3-1.

2번과 3번은 별개의 문제이다. 2번 문제에 비해서 3번의 문제를 먼저 다루는 것을 요청하시는 분이 몇분 계셔서 2에 앞서서 3을 먼저 다루기로 한다. 3에서 다룰 이야기는 1의 논의를 전제로 한다. 3에서 다룰 문제는 '나와 타자'를 다루는 '관계의 문제'라고 일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사회적 규범과 법 그리고 개인에 대한 논의와 그 맥을 같이한다. 만일 세계가 문제 1에서 기술되었던 바와 같이, '감각적 앎'에서 추론된 '지성적 앎'으로 나아간다고 한다면, 약간의 '비약'이 있다고 생각하나, 세계는 나의 경험의 확장이고, 세계가 만일 나의 경험의 확장이라고 한다면, 그 경험속에 주어진 대상들과의 관계들에 있어서 내가 어떠한 '행위'를 하던들 그것은 실제로는 나의 경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들에 대해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관계를 고려하여 행동하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안의 관계들만을 다루는 것이 됨으로 실질적으로 대상과의 관계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의미를 상실한다.

->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겪는다. 그것은 내가 양심이라고 부르는 문제인데, 만일 야생의 상태에 순전히 내가 놓여져 있다면, 나에게 어떠한 욕구가 있고 그것을 해소하고자 하는 방법을 안다면, 그것에 대해서 타자의 시선과 관계 없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경우를 볼 수 있다. 좀 극단적인 경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만일 현재 순간에 흔히 통칭되는 개념적인 '인간'을 살해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있을 때 내 손에 칼이 쥐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인'행위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만일 야생의 상태에 놓여 있고 상대방을 인간으로 간주할만한 어떠한 근거지을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면 나는 잔혹하게 상대에 대해서 살인행위를 자행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사회 내에 포함되어 있고 내가 나무를 인간으로 간주하고 있을 경우 나는 나무를 베는 행위를 마치 '살인 행위'와 같은 것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 이 문제는 나는 개고기에 대한 사회적 문제에서 등장하는 관점과 비슷하게 생각하는데, 규범은 상대 인간을 존중하라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인간'에 대한 범주의 확정은 어렵다. 개별적 인간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사용한 개별자들에게 내적으로 완결하게 주어져 있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같지 않다. 그것은 전제 1과 같은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앞의 '나무'의 예시에서와 같이, 개를 친구이자 인간으로 취급하는, 일종의 개라고 지칭되는 실재물을 인간이라고 불러지는 개념 하에 둔다면, 개를 잡아먹는 행위는 그들에게 살인하는 행위와 진배없으며 그들 나름의 '규범성'에서는 지양되어야 할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들의 행동은 개별적으로 일관적이나, 타자에게서는 일관적이기 어렵다. ( 그들은 규범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서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하나, 그렇게 결정한 스스로의 행동은 '규범성'에서 차이를 발생시킨다. 서로 믿고 있는 '인권'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는 점은 이것을 지칭한다. 너가 생각하는 용맹함과 내가 생각하는 용맹함이 같은지 알 수 없고, 결국 따져봄의 문제가 발생하며, 언어는 명분이오 실질은 '통제가능한 대상'에서 발생함에 대한 권력적인 행동에 대한 논의가 이와 연결된다. 과거에 언급한바 있듯이, 내가 타자를 통제하는 방법은 말로써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있고, 힘으로 상대방을 누르는 것이 있고, 혹은 정신적으로 감명깊게 만드는 방식이 있다. 각 방법 모두 상대를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공통적으로 사용되며, 여기서의 규범성에 대한 문제는 힘으로 상대방을 누르는 것과 '설득'과 연결된다.)

-> 다음과 같은 경우를 가정할 수 있다. 내가 만일 어떠한 교육도 받지 않았다면, 나는 사회에 포함되었다고 하더라도 나의 행동에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다. 정말로 그럴 것 같고, 자유거래를 보장해주지 않는 국가 내에서 내가 만일 그 국가의 '규범'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다면 나는 타인을 관찰함에 있어서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집단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나는 거리낌 없이 행동할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게 만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어떻게 이와 같은 판단을 얻게 되었는가? 이것은 타인에 의해서 주어진 것은 분명히 아니다. 타인에 의해서 해당 지식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필히 간접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직접적으로 주어질 수 없을 것이다.(왜냐하면 그것은 경유한 앎을 형성할 수 없을테니까, 유일하게 경유할 수 있는 것은 해당 언화행위에 대한 나의 개념적 대응에서만 가능할터인데, 말로 전해지는 지식은 말의 형식에 대한 경유한 앎을 갖는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말과 대응되는 의미의 논리적 관계에 대한 지성적 통찰을 갖지 못한다면, 이를 지각하기는 어려운 문제이다.[나는 이 부분에서 백문이불여일견을 해석한다.{여기서 봄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감각함을 의미한다.}] 말은 떠올리게 할 수 있어도, 실질적으로 개념을 알려주지 못한다. '사과'에 대한 개념을 모르는 사람에게 사과를 말해준다고 하던들 그 사람은 사과에 대해서 알지 못함은 분명할 것이며, 사과의 달콤함에 대해서 설명한다고 하던들 사과를 직접 먹어보지 않고는 사과의 달콤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것이다. )

그렇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감각적' '지성적' '반성적(2부에서 등장할 개념인데 설명하지 않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내가 가지고 있는 판단들에 대해서 재관찰(재인상이라는 말도 사용한다.)과 같은 것이며, 과거의 것을 경유한 앎을 의미한다. 여기서 과거의 것을 경유한 앎이라는 것은 대상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으로 도달해야 할 것이다. (없음 -> 감각적 앎 -> 지성적 앎 -> [반성적 앎, 감각적 앎] -> 지성적 앎 .. to inf) 그렇다면 그것은 필히 '경험적'어야아 한다.

엄밀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을 너무 성급하게 결론 내리는 감이 있는데, 나는 경험적으로 왜 해야함을 습득한다. 나의 판단은 과거의 경험의 재인상과 현재의 '감각적 앎'과 그에서 비롯한 종합적 '지성적 앎'(추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판단의 근거로써 주어진 과거의 '경험'이라는 것 혹은 지성적인 앎이라는 것은 그 다음 판단의 근거로써 재인상됨에 따라서 행동의 경향성을 가져온다. 그것은 '일관적'이지 않지만 '일관적'으로 보이는 감각적인 앎의 속성과 매우 유사하다. 나는 '태어남'으로써 사회와 계약을 맺지 않았지만, 사회에서 '살아감'으로써 사회와 계약을 맺는다. (사람들이 인권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결국 사회에 포함된 개인으로써 가지고 있는 사회와의 계약적 근거로써의 양심에 대한 충분한 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양심이 만들어낸 당위가 그들의 행동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것은 규범성의 효력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 무경험적인 상태에서 경험한 이후에 행해진 판단의 근거는 경험으로 부터 기원한다. 집단 내에서 경험한 사람이 처음부터 자신이 집단과 계약 선택할 자유는 있었다고 생각하나, 사실 이것은 집단 내에서의 경험 이후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단내에서의 포함됨으로써 획득된 지식으로부터 추론된 '계약'에 대한 앎이 과거로 소급하여 계약이 불공정 계약임을 주장할만한 정당한 근거가 되는가 한다면 이는 어려워보인다.

나는 사회라는 것은 결국 규범성의 형식적 토대를 위한 '보자기'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형식일 뿐, 사실은 개별의 의지와 그 의지에 대한 Some x인 규범에 대한 의지의 결합이다. 그 양심을 다룸으로써 강력한 통제력을 획득한다. 그것은 의식적으로든 가시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비가시적으로든 나타난다. 3-2 파트의 사랑함에 대한 예시는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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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새는 잠을 조절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잠을 잘때 어떻게 잠을 자야 쾌감이 극대화 되는가에 대해서 경험적으로 알아낸것만 같은 기분인데, 아침에 일어나면 뭔가 온 몸이 나른하면서 동시에 기지개를 펼 때 느껴지는 느낌의 전율이 온다. 상당히 이 점은 좋지만 어쩌면 이것이 최근의 나의 상황이 너무나 고달프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침대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 같다.

2. 예전에 다른 사람이랑 세미나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나는 다른 사람들이랑 어떤 주제에 대해서 세미나를 하면 공통의 주제에 대해서 세미나를 하는게 아니라 내 생각으로 세미나를 이끌어나가기 때문에 전혀 세미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과거 수업 때 나는 수업을 잘 듣지 않고 내 방식대로 솔로 플레이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심지어 나는 명목상 다닌다고 했던 학원에서조차 수업이라는 것을 들은적이 없다. 아마 이것은 내 중학교 때 얻었던 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의 연장에 있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 당시 이후로 사람의 말을 귀담은 노력을 안 했더니 글을 읽는 것이면 모를까 남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능력은 잘 숙달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3. 요새 만나는 Anti-child 그리스인 모임은 상당히 인상깊다. 그리스 전공 교수님 한 분하고 물리학과 학부생 하나하고 나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통적으로 이해됨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며, 예측되는 합리에 대해서 인상깊게 생각한다. 세계를 분절하고 쌓으려고 하는 욕구가 상당히 강하며 형이상학적 마인드에 친숙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수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으며, 이 모임원 중 물리학과 학생에 대해서는 상당히 '인상깊게' 생각하는데, 그 친구의 경우에는 나보다 나이가 3살정도 어리고, 프랑스 문학에 친숙하고 의지와 표상으로써의 세계를 읽어봤으며 니체의 책과 친숙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의 저작을 읽어본 학생이다. 심지어 물리학과임에도 불구하고 논리의 확정성(TF)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으며 음악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은데, 음악을 연구하여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이상을 가지고 있다. 참으로 멋지지 아니하다 말할 수 없는 사람의 부류다.

이 모임의 특징은 말 그대로 'Anti Child'라고 통칭할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4. 금년은 우연의 여신이 나에게 가호를 내려주셨는지 모르겠다.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고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이런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고 한다면, 나는 정말로 즐겁다 말할 수 있겠다.

미치광이 호랑이모임, Antichild 그리스인, 법률가 마르크스, 언철 모임은 그대로 유지하면 좋을듯한 모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 현상학 모임 하나 추가할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일단 이건 2학기로 유예할 생각

Posted by 종합유추

쓰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할 이야기도 많다. 자기 전에 간략하게 적자면 다음과 같다.

1. 의무만 있는것도 없고 책임만 있는 것도 없다. 더욱이 평등이라는 이름의 체제하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실권자가 있기 마련이고 항시 힘을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문제들이 발생한다.

어떤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라면 그 문제는 필연코 영향력이나 힘의 문제가 발생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뜻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크게 두가지 방법을 쓰는 것 같은데. 하나는 강압이나 혹은 강압과 유사한 힘으로 상대방을 눌러버린다거나 다른 하나는 적합한 방법을 통해서 상호간의 합의점을 도출하는 방법이 그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전자와 후자를 결정하는 요인은 일종의 그 사회집단의 비판력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는데, 대화와 토론 그리고 합의와 건전한 비판과 사실의 정확한 따져봄의 노력에 의해서 형성된 사회의 경우에는 후자의 전통이 제안될 가능성에 가깝고, 그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감정이나 흔한 경기 관중의 bias를 가진 국가의 경우에는 전자에 가깝다.

전자와 후자 모두 발생가능한 현상이기는 하나 나는 후자의 상태를 좀 더 긍정적으로 보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비록 그 정치적인 것이 편중되는 경향성은 있으나 필연적으로 엄밀하게 따져봄에서 발생한 합의이기 때문에 사실상 사회내 힘의 통합이 수월하며, 전자의 경우에는 언제든 사람들에게 어떠한 bias를 심어주는가를 통하여 매 순간 그 힘의 방향이 변하여 분산이 쉬이 발생하는데 힘의 통제의 측면에서 비효율 적이라고 말하겠다.

나는 한국의 피상적인 사회가 전자에 가깝다고 보며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정부도 마찬가지고 그것에 반항하거나 따라가는 국민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입법의 과정에서 제안되는 입법안을 살펴본다면 꽤 체계적이고 설명력있게 쓰여져 있는 경우가 많기에 그들의 노력을 전자와 같은 것으로 본다는 것은 그들의 설명을 위한 노력을 비하하는것과 같이 느껴져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많은 수의 사람들은 어떤 구체적인 합의를 도출하려고 하기보다는 한 순간의 자신의 욕구나 자신의 의지만를 실현하려고만 하면, 그 대립은 결국 나도 너 말을 안 듣고 너도 내 말을 안 들으며 서로 이해할 노력은 하기 싫으니 그냥 계속 비능률적으로 다투고 싸웁시다 하는 정도의 이야기로 들린다는 점은 꽤 부정적으로 보인다.

예를들어 예전에 언급한 바 있듯이. 등록금을 인하하라는 요구에 대해서 굳이 나는 한국의 대학 등록금은 시장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내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데. 간략하게 당시의 생각을 요약하자면,

'한국의 대학은 학생들을 실질적으로 교육하는것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학벌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판매하기 위한 기업의 성격을 더욱 강하게 띄고 있다. 이것은 시장분석에서 내가 이야기 했던것과 같은 맥락을 띄고 있는데 기업의 생산관리의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분석이고, 시장 분석이라 함은 시장의 예상되는 수요자의 선호를 분석하여 어떠한 방법으로 제품을 공급했을 때 최대의 이익을 누릴 수 있는가가 그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대학이 기업과 같은 속성을 보인다면, 필히 그 수요자의 성향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해야함이 분명한데, 대학교에 오는 많은 학생들을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함과 좋은 학벌을 얻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대학들은 과연 이러한 시장의 수요자의 성향에 자신들의 공급을 맞춰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학벌을 얻거나 혹은 돈을 벌기위해서 학교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게 하고 혹은 다른 연구나 공부를 하고 싶어서 오는 학생들에게는 그에 맞게 그들의 성과나 사고 능력을 염두해두고 장학혜택을 주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마치 아이스크림 회사들의 처음 균형가격만 높게 기록하여 가게등에 판매하고 그것을 재판매하는 사람들에게 자율적으로 가격차별을 행할 수 있게 만들듯이. 국가도 대학에게 그렇게 할 때 소비자의 성향에 맞는 공급을 할 수 있을 것인바. 대학등록금에 대해서 규제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가 주요논지인 글에서처럼 정당한 논리하에서 상대방에게 어떤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합당한지를 따져보는 글에서와 같은 방식의 논리성과 합의의 개념이 들어간다면 적절할 것이고. 현재 한국에서와 같이 끊임없이 자신의 것을 요구할 생각만 하며 합의의 개념을 거부하고 자신의 가치의 온전함만을 자신의 세계 넘어서 현실에 세우려고 하는 것는 감히 말하건데 병신짓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결국 이 과정에서는 왜 이게 필요하고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며 그것의 실현가능성은 있고 타자와의 이익조율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 엄격하게 따짐의 합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미성숙한 어린아이의 인간상과 비슷하다고 나는 말하며, 나에게도 그런 면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2. 주변에 연애를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에게 오지랖을 좀 부리자면, 내 관점에서는 사실 연인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친한 친구와도 같은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선호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그 방법은 굳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나는 본다. 서로가 서로를 관계상 선호하기 때문에 관계가 발생하고 관계의 존재라는 선재조건이 없으면 결국 연인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관계도 없기 때문에 연인의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연인 사이에는 무슨 '사랑해'라는 말을 남발하고, 매일 한번쯤은 연락하고, 매일 오글거리는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라고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상 나는 이것을 매스컴이 만들어낸 일종의 괴랄한 규범적인 연인 관계라고 생각한다. 순전히 이것은 관계이기 보다는 연인이라는 환상이며, 이것을 기대하고 관계를 성립시킨다는 것은 요새 유행하는 금사빠(?, 맞는지 모르겠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관계라던데)와 같은 것으로 자연스럽지 못한 상태를 발현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해진다.

친한 친구의 관계를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데, 나와 친한 친구인 현준이 형의 예시를 들어보자. 현준의 형과 나는 처음부터 우리는 좋은 친구야!라고 말하고 만나지 않았다. 설령 지금의 상황에서도 '앞으로 우리는 이 관계를 좋은 친구의 관계로 규정합니다.'에 관한 요식계약서도 쓴 적이 없다. 서로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취미가 맞아서 친해졌고, 각자가 자신의 선호에 맞게 상대방에게 자신의 방식으로 대함으로써 그리고 서로가 그 방식에서 상대방을 자신의 방식으로 선호함으로써 좋은 친구라고 불릴만한 관계가(아 물론 현준이 형은 나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자연스레 성립했다. 이것은 연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상대방과 굳이 우리는 연인사이야 해야지 연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선호가 있고 상대방이 자신을 향하는 모종의 선호가 있어 그 관계가 성립항 때 자연스레 연인이든 친구든 어떤 관계가 도출된다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 외형상의 멋진인간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옆에 있을때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라고 말하겠다.

흔히 말하듯, 먼 곳에서 연인을 찾지 말고 가까운 근처를 보세요. 가 나는 이런 맥락이라고 이해를 한다.

오늘은 이만 줄이자.

 

Posted by 종합유추

옛날 옛적 어느 갑이라는 마을에는 A, B, C, D, E, F 여섯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 마을에는 매일 6개의 사과가 열리는 마법의 사과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 마을의 사람들은 각자 하루에 4시간 정도의 나무를 가꾸는 노동을 해야 했으며 그 대가로 나무에서 매일 하나씩의 과일을 따먹었다, 그들은 비록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남의 것을 빼앗으면 남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며 그렇게 된다면 나무가 제대로 가꾸어지지 않아서 말라 비틀어 죽을 것을 알았고, 그 결과가 모든 마을 주민들이 굶어 죽을 것임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서 비록 가난하지만 근근히 생을 연명해나갔다.

매일 하나의 사과가 가져다주는 허기에 싫증이 난 마을주민 A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하루 종일 마법의 나무를 날마다 연구했다. A는 어떻게 사과나무를 관리하면 사과가 더 많이 나는지를 고민했고, 그 성과를 얻어 사과나무를 잘 가꾸고 보호해서 6개의 열매가 열리는 사과나무를 11개의 열매가 열리는 사과 나무로 바꾸어 놓았다. 마을주민 A는 사과나무의 나머지 5개의 과실이 열리는 방법에 대한 독점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이 만일 그 과실을 모두 독점했을 때, 사과나무를 모두 함께 사과나무를 가꾸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불만을 품을까 두려워 자신의 성과을 일부 나누어주기로 했다.

마을 주민 A는 자신은 사과 3.5개를 갖고 B, C, D, E, F에게 사과의 반쪽을 더 주어 각자 1.5개의 사과를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고, B, C, D, E, F는 그 기술이 A가 독점적으로 개발한 것이므로 그 체제에 만족했다.

마을 주민 A는 자신이 노력한 대가로 사과 3.5개를 먹게 되었음으로, 기술의 개발이 삶의 질에 굉장히 훌륭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지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A는 좀 더 사과나무를 연구한다면 더 많은 사과를 먹을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A는 기존에 각자 최소 나무를 보살피는 4시간 가량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규칙을 준수한 상태에서 자신이 좀 더 오랫동안 사과나무를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 B와 C에게 사과 0.5개씩을 각자 나누어 주어 B하고 C에게 각자 2시간의 보살피는 시간을 더 하게 하는 계약을 맺음으로 그 4시간도 자신이 사과나무를 연구할 수 있는 시간으로 투자하기를 시도했다.

그 결과 A는 0시간의 노동을 하고, B와 C는 6시간, D와 E와 F는 4시간의 노동을 하게 되었고, A는 2.5개의 사과을 먹을 수 있고, B와 C는 각각 2개의 사과를 D와 E와 F는 각각 1.5개의 사과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두개의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는 A의 발견이다. A는 사과나무를 연구하던 도중 사과나무에서 계속 11개의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과나무의 생명이 단축되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나, 6개씩 생산하는 것에 비해서는 유의미한 차이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이 오랫동안 번창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기존의 사과나무의 생명을 늘리기 위한 연구를 하거나, 혹은 다른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한 것을 확인했다.

다른 하나는 E의 정치적 행보이다. 어느날 마을 주민 E는 11개의 사과가 6명에게 차별적으로 분배되는 것을 목격했다. E는 A가 일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2.5개의 사과를 먹는 것을 보았고, 그의 마음에 불화가 찾아왔다. E의 마음에는 '저 A라는 놈은 일도 하지 않으면서 2.5개의 사과를 먹고 있는데, 이것은 부당하다. 사과는 일한 사람에게 일한 만큼 돌아가야 한다.'라고 말하며 A도 일을 해야하며 A를 포함한 나머지 5명에게 11개의 사과를 공동 분배해야 함을 설득했다.

B는 자신은 A와 자유계약을 맺었고 나는 이것을 선택했음으로 A와의 계약을 이행해야 하며 A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과실이 돌아가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C는 자신이 비록 A와 자유계약을 맺었지만, 2시간에 대해서 0.5개의 사과는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적어도 2시간에 대해서는 1개 이상의 사과가 필요함을 주장했다.

D는 원래 4시간 일하고 1개의 사과를 먹는 것보다 1.5개의 사과를 먹는 것이 더 좋았지만, A는 그만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공동분배를 해야한다는 확신은 갖지 않았다.

F는 비록 지금 1.5개의 사과를 먹고 더 생활이 좋아졌지만 만일 A로 부터 남은 사과를 뺏어온다면 최소 0.3개 이상이 사과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 E의 생각에 동조했다.

E는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집단내에서 과반수 이상의 사람이 주장에 동의할 때 정치적으로 한 사람의 행동을 제약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E의 주장에는 C와 F가 동조하였으며, 현실상황에 만족하고 그다지 상대방 주장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싶어하지 않은 D의 경우에는 기권을 냈으며, B와 A는 여기에 대해서 반대표를 던졌다. 결국 투표의 결과 찬성 3 기권 1 반대 2로 A에게서 사과를 뺏어와야 한다고 결정이 나왔고, A도 그에 합당한 노동을 해야함을 E는 다수결을 통하여 정당성을 얻어냈다.

이런 결과에 대해서 동조할 수 없다고 생각한 A는 화가 나서 "난 더 이상 사과나무에 대해서 내 기술을 투자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과나무는 다시 생산력이 11개에서 6개로 줄어들었고, 각자 한개의 사과를 먹게 되었다.

E는 A가 너무 자기 밖에 모르고 이기적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모아 A에게 강압적으로 사과나무의 생산성을 증대시켜야 함을 주장했고, A는 '나는 그럴 수 없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부당하다.'라고 주장했다. E는 분노한 마을 사람들을 모아 A에게 노동과 연구를 강요했고, 그 결과 A는 다른 마을로 떠나 버렸다.

A가 떠나 버린 마을에는 A의 공백을 다른 사람들이 채워야 했으며, 그 결과 사과를 1.2개에 4.8시간을 들여 일을 하게 되었다. E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실 이것도 사과 1개에 4시간이기 때문에 비율상 큰 차이가 없다는 말로 사람들에게 주장하며, 비록 빈곤하지만 공평하고 정당한 체제를 이루어냈다고 사람들에게 말했으나, 사람들은 그다지 풍요로움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리고 얼마안가 매일 6개의 사과를 맺던 사과나무는 죽어버렸고, 마을 주민들은 굶어 죽거나 다른 마을을 찾아 떠나야만 했다.

과연 여기서 잘못한 것은 누구인가? 이기적인 기술을 독점한 A일수도 있고 혹은 A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은 E일수도 있고, 혹은 그에 동조한 사람들일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이 잘못 되었거나 잘 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겠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다.

https://www.facebook.com/hyoyoung.h.kim.5/posts/798904326800772

Posted by 종합유추

글을 쓴다는 것은 마치 애벌레가 자신의 고치를 만드는 것과 같다. 애벌레가 고군분투를 하여 자신의 고치를 만드는 것 처럼 작가도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소설을 만들어낸다. 그 고치의 형태에 맞춰서 몸을 변형시키고 허물을 벗고 날아가는 벌레의 성충과 같이, 작가도 자신의 작품을 완성시킴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며 이전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작가는 끊임없이 소설을 쓰면서 새롭게 태어난다. 스스로의 필요에 의하여 작품을 쓰는 사람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는 결코 죽지 않는다.

-140709-

Posted by 종합유추

1. 실업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느냐 하니 정부냐? 기업이냐? 아니면 '애플'이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쉽사리 책임을 묻기가 힘들다.

2. 삼성전자의 어닝쇼크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뚜렷하다. 2009년까지만 해도 주식가격이 60만원이었던 삼성이 2013년 1월에 158만 4천원을 찍었다. 2009년부터 2013년에 무슨일이 일어났을지는 대강 다 알것이라고 생각하며, 주식가치가 세배가까이 불어난 것은 그만큼 가치가 상승했음을 말할 수 있으므로 삼전 회사가 가진 한국경제의 상징적인 위치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참고로 말하자면 기아나 현대 혹은 LG 같은 기업들의 경우 30~60정도 160이면 꽤 높은 수치)

2013년 대비 매출액은 10퍼센트가 감소했고, 영업이익은 24.5퍼센트 감소했다. 9년동안 매출액이 감소한적이 없고, 서브프라임사태 때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던 '삼전'이 금번 어닝쇼크를 맞았다는 것은, 그만큼 삼성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 된다.

100만원 버는 집안에서 10퍼센트가 감소했다는 것은 10만원 정도지만 10조 버는 집안에서 10퍼센트가 감소했다는 것은 1조가 감소했다는 것, 삼성의 사이즈에 비교해보자면 이것은 굉장한 쇼크라고 볼 수 있음. 자세한 사정은 모르니 확신은 하지 않겠음.

3. 삼성전자는 전자제품의 반제품 부분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다만 고수익 시장에서 멀어진다는 정도.

4. 삼성의 입장에서 볼 때 삼성에서 '노조'를 인정했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뭔지는 잘 모르겠음. 뭘까? 어떤 유인이 삼성으로 하여금 노조를 인정하게 만들었을까? 합리적인 구조조정인가.

Posted by 종합유추

1. 오늘 생각해보니 대형마트의 영업구조 자체는 매우 경제적으로 효과적이긴 한 것 같음. 기존 재래시장의 경우에는 상품을 대체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을지 몰라도 결제시스템이 다 개별이라서 (비교하는데 들어가는 시간 + 개별 결제하는데 들어가는 시간 + 개별 점포를 열면서 발생하는 관리비의 추가분)등이 발생지만, 대형마트의 경우에는 다른 회사제품정도만 비교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으나 일괄된 계산 및 동선을 고려한 물건 배치 및 합리적인 점포당 인원 배치와 같은 방법으로 매장 환경 개선 + Transaction Cost 감소 등과 같은 여러 부분의 경제적 비효율성을 꽤 높은 부분으로 감소시킬 수 있음. 비교하자면 재래시장 - 대형마트 - 온라인 매장 의 순으로 그 효율성이 극과 극으로 차이나는듯 싶음, 앞에서 뒤로 갈수록 시간 비용이 줄어들음, 시간 비용의 기회비용을 따져볼 때 어떤것이 좋은지는 이제 개별 선택자 마음.

2. A라는 업무를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이 많아질수록 A라는 업무 자체는 희소성을 잃게 됨. 누구나 다 편의점 알바할 수 있는데 편의점주가 굳이 알바생에게 돈을 많이 줄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다지 피고용자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개발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고용자는 그 대상에 대해서 딱히 높은 가격으로 노동임금을 줄 유인은 없음. 희소할수록 그 가치는 증대됨.

3. 흔히 사람들이 잘 아는 게임중에 LOL이라는 게임이 있는데, 거기 게임 챔피언 중에 '렝가'라는게 있음. 렝가라는 챔피언에는 버그가 있어서 통상적으로 스킬을 쓰면 그러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스킬이 하나 더 박힘. 그러니 데미지가 통상적으로 더 들어감, 그래서 게임회사가 이건 패치해야겠다 싶어서 패치를 했음. 그런데 게임 패치된 것은 고려 안하고 예전 버전 렝가 공략집으로 게임하는데 게임 안 풀리니까 게임회사에 가서 '렝가 공략집대로 했는데 왜 게임이 제대로 안 됨? 당장 패치 이전으로 게임 돌려라!'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저 인간 왜 저래 라고 할 것 같음. 이런 버그를 안 고치는 것은 소수의 렝가유저를 위해 게임 전체 밸런스를 붕괴시키는 것과 차이가 없을듯.

물론 합리적이라는 말하고 '효율성과 형평성'은 엄연히 별개의 개념이니 가장 효율적인게 합리적이라던가 아니면 가장 형평적인게 합리적이라는 반박은 구체적인 '논리적 근거'가 있지 않다면 대답 안함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자신있게, 임금은 물가상승률을 고려해야 하는거 아닌가요? 물가상승률을 고려 안하고 정체된 임금은 실질임금의 하락을 가져옴으로 이건 정당하지 못해요 개별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낮아지잖아요! 라고 했던 적이 있는데, 한 2년전인가 생각해보니 고임금의 직종의 경우 처음에는 그 능력의 희소성으로 고임금이였을지 모르겠지만, 후일에 사람들이 해당 노동시장에 진입함으로 희소성이 하락하여 임금이 하락하지 않은것만해도 다행이라고 말하는 자신을 발견함. 당시 어렸기에 망정이지 어리지 않았다면 뭔가 부끄러울뻔했기도..(참고로, 희소성이 높고 위험을 많이 보유한 직종의 경우에는 임금의 방식이든 혹은 포괄손익의 방식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High return은 있는듯. 물론 도박같은건 너무 낮은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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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종합유추

어렸을 적을 회고해본다면, 초등학교 저학년 당시에 학교에는 그런 관습같은게 하나 있었다. 한 아이가 생일이 되면 그 반의 친구들을 자신의 생일파티에 초대를 하고 그것을 축하받는 일이었다. 매번 친구들의 생일파티에 갈 때 나는 2000원에서 3000원 정도 하는 필기도구 같은것을 지금 생각하면 촌스럽지만 화려한 포장지에 싸들고 갔었다. 뭐 당시에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름이 안 쓰여져 있으면 그 내부에 어떤것이 들었는지 조차 알 겨를이 없기 때문에 어떤 선물이든 상관 없었겠지만, 나는 문학을 전공하신 어머니의 추천이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항상 연필이나 필기도구와 같은 것을 선물했었다. 이런 행사와 같은 것은 보통 한달에 2번에서 3번 정도 있었고, 그곳에 가서 나는 가벼운 조리식품이나 달콤하고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고, 당시 TV에서 방영하던 애니메이션인 포켓몬스터나 아니면 구슬동자를 보거나 게임보이를 가지고 게임을 즐기거나 혹은 포켓몬스터 딱지 같은 것으로 딱지치기와 비슷한 놀이를 했었던 것 같다. (중략)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집에 있는 책들을 보면서 초등학교 때 C언어를 익혔었고, 그 당시 나이에 적합하지도 않은 중학 수학을 했으며, 고등학교 범위의 사회를 공부했었는지는 나도 모를일이다. 아버지는 왜 해야하는가에 대해서 나에게 납득을 시켜주지를 못했다. 배웠던 한문과 사서삼경 그리고 어머니가 집에 쟁여둔 독일 문학집에서도 나는 그 답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만도 같아. 그저 체념하고 뭐 당연한 것이겠지 하고 받아들이고 살아갔었고(후략)

 

Posted by 종합유추

폐쇄경제 하에서 화폐는 국내의 재화에 대한 수요와 유사한 방식으로 분배가 발생하며, 그 과정에서 화폐의 집중은 높은 수요의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자에게 나타나며 이것은 국내의 자원이라는 한정하에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높은 수요의 국내 생산된 재화를 가지고 그 배분을 통제할 수 있는자'에게 그 힘이 집중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잉여자원을 거래할만큼 그 자원이 충분하지 못하다면 토탈 파워의 분배 방식에서 '자원'을 통한 분배의 방식은 그다지 유의미한 차이를 가지지 못하며, 권력 층위(왕, 신하, 백성, 지주, 소작농)의 힘의 재편성이 더 큰 영향력을 미친다. (중략)

하지만 해외거래가 활발해지면 이제 그 매커니즘이 전환된다. 조선시대에 대한 예시로 접근한다면, 이제 '은- 상평통보' '상평통보- 자원' '은-자원'에서 '은-상평통보' '은-자원'의 부분의 시장이 확대되는 것인데, 이 경우에는 은을 통하여 해외의 자원을 국내로 들여올...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기존의 권력 계급관계에 의해서만 권력관계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은'의 보유량이 그 권력의 분배를 다루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게 된다. 다시 말해 과거의 경우에는 권력 계급의 관계 -> 자원의 분배를 다루었다면, 이제는 (권력 계급의 관계, 해외 통화의 보유량) -> 자원의 분배를 다루게 되는 것이다.(중략)

한국의 경우를 본다면, 한국의 경우에는 자원의 주 생산국이 아니다. 원재료의 수출국도 아니며, 대게는 원재료의 수입국에 해당한다. 이 경우에는 이제 '달러-원화-자원'의 문제나 '금,은-원화-자원'의 측면으로 접근할 때 사실상 저 '자원'에 해당하는 것은 개인의 '노동력'이나 '위험', '불확실성'정도의 것밖에 없다. 다시 말해 한국은 자원에 대해서는 매우 해외의존적이고, '해외법화 - 원화'에 민감하지 '원화 - 자원'에 민감한 국가는 아니다. '달러-원화'에 대해서 매우 의존적일 수 밖에 없으며 그 가운데 자원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로 다루어지지 않고, '화폐의 보유'가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대두된다. 이것은 전형적인 '상업도시'의 사례라고 말할 수 있으며, 여기서 화폐의 보유 정도는 수요나 힘의 밀집과 굉장히 '밀접한 연관'을 지니게 됨으로, 화폐의 가치 등락은 자원의 문제에서 넘어서서 힘의 분배 문제와 굉장히 밀접한 연관을 지니게 된다.(후략)

화폐와 권력

Posted by 종합유추

세월호 특별법 관련 이야기가 많습니다. 의회에 올라온 세월호 관련 의안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대학입학 지원에 관한 법안, 다른 하나는 세월호 진상조사 및 침몰사고 피해보상에 관련된 법안입니다.

대학입학 지원에 관한 법안 : 1911077(새정치), 1911155(새누리)
진상조사 및 피해 보상에 관한 법안 : 1911080(새정치), 1911093(새누리), 1910943(이상규, 통진당), 1911048, 1911050, 1911058
*(굳이 발의자의 당명을 구분한 이유는 프레임 문제가 개입될 수 있어서)

...

다음과 같은 사실은 명확합니다. 1911077 법안과 1911080 법안은 다른 법안입니다. 1911077 법안이 통과된다고 해서 1911080 법안까지 같이 도매로 넘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입법의 과정에서 법안 의결에 있어서는 별도의 '합의'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세월호 특별법 문제와 관련되서 해당 유가족들이 어떤 '특별법'을 특정하고자 하는지 밝히는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일 유가족이 특정하고 있는 법안의 범위가 (1911080, 1911093)이라고 한다면, 유가족이 주장하고 있는 '세월호 특별법' 문제는 '세월호 대학 특례'문제와 그다지 큰 연관성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 유가족에 대해서 '대학을 빌미로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가족이 특정하고 있는 법안에 (1911077,1911155)이 포함된다고 한다면 이 경우에 대해서는 유가족이 대학 특례를 요청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 경우에는 유가족에 대한 '대학 특례' 문제로 비판하는 것은 적합할 수 있습니다.

법안 자체의 정당성을 넘어서, 비판의 초점의 범주를 구분하는 것은 논의에서 벗어난 다른 무의미한 비판을 하지 않기 위한 적절한 방법중에 하나입니다. 우선 '세월호 대학 특별법'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 '정의당'이나 '통진당'과 같은 비주류 야권이 개입하지 않고 있는것도 살짝 저 법안의 의도가 불순하다는 '추정'은 할 수 있겠지만, 단순히 추정일 뿐임으로 '그러하다'는 형식의 높은 수준의 확신은 하지 않습니다.

법안의 내용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우선 초점을 명확히 하고 해당 법안이 '유가족의 입장'인지 아니면 '정치가의 입장'인지 명료하게 구분하는 것은 효과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p.s '세-특'에서 정치적 기술이 많이 동원되고 있다는 느낌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한X례, 조X, 동X, 경X 에서들 말하는 내용을 좀 걸러 들으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Posted by 종합유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