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2번과 3번은 별개의 문제이다. 2번 문제에 비해서 3번의 문제를 먼저 다루는 것을 요청하시는 분이 몇분 계셔서 2에 앞서서 3을 먼저 다루기로 한다. 3에서 다룰 이야기는 1의 논의를 전제로 한다. 3에서 다룰 문제는 '나와 타자'를 다루는 '관계의 문제'라고 일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사회적 규범과 법 그리고 개인에 대한 논의와 그 맥을 같이한다. 만일 세계가 문제 1에서 기술되었던 바와 같이, '감각적 앎'에서 추론된 '지성적 앎'으로 나아간다고 한다면, 약간의 '비약'이 있다고 생각하나, 세계는 나의 경험의 확장이고, 세계가 만일 나의 경험의 확장이라고 한다면, 그 경험속에 주어진 대상들과의 관계들에 있어서 내가 어떠한 '행위'를 하던들 그것은 실제로는 나의 경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들에 대해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관계를 고려하여 행동하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안의 관계들만을 다루는 것이 됨으로 실질적으로 대상과의 관계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의미를 상실한다.

->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겪는다. 그것은 내가 양심이라고 부르는 문제인데, 만일 야생의 상태에 순전히 내가 놓여져 있다면, 나에게 어떠한 욕구가 있고 그것을 해소하고자 하는 방법을 안다면, 그것에 대해서 타자의 시선과 관계 없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경우를 볼 수 있다. 좀 극단적인 경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만일 현재 순간에 흔히 통칭되는 개념적인 '인간'을 살해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있을 때 내 손에 칼이 쥐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인'행위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만일 야생의 상태에 놓여 있고 상대방을 인간으로 간주할만한 어떠한 근거지을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면 나는 잔혹하게 상대에 대해서 살인행위를 자행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사회 내에 포함되어 있고 내가 나무를 인간으로 간주하고 있을 경우 나는 나무를 베는 행위를 마치 '살인 행위'와 같은 것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 이 문제는 나는 개고기에 대한 사회적 문제에서 등장하는 관점과 비슷하게 생각하는데, 규범은 상대 인간을 존중하라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인간'에 대한 범주의 확정은 어렵다. 개별적 인간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사용한 개별자들에게 내적으로 완결하게 주어져 있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같지 않다. 그것은 전제 1과 같은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앞의 '나무'의 예시에서와 같이, 개를 친구이자 인간으로 취급하는, 일종의 개라고 지칭되는 실재물을 인간이라고 불러지는 개념 하에 둔다면, 개를 잡아먹는 행위는 그들에게 살인하는 행위와 진배없으며 그들 나름의 '규범성'에서는 지양되어야 할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들의 행동은 개별적으로 일관적이나, 타자에게서는 일관적이기 어렵다. ( 그들은 규범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서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하나, 그렇게 결정한 스스로의 행동은 '규범성'에서 차이를 발생시킨다. 서로 믿고 있는 '인권'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는 점은 이것을 지칭한다. 너가 생각하는 용맹함과 내가 생각하는 용맹함이 같은지 알 수 없고, 결국 따져봄의 문제가 발생하며, 언어는 명분이오 실질은 '통제가능한 대상'에서 발생함에 대한 권력적인 행동에 대한 논의가 이와 연결된다. 과거에 언급한바 있듯이, 내가 타자를 통제하는 방법은 말로써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있고, 힘으로 상대방을 누르는 것이 있고, 혹은 정신적으로 감명깊게 만드는 방식이 있다. 각 방법 모두 상대를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공통적으로 사용되며, 여기서의 규범성에 대한 문제는 힘으로 상대방을 누르는 것과 '설득'과 연결된다.)

-> 다음과 같은 경우를 가정할 수 있다. 내가 만일 어떠한 교육도 받지 않았다면, 나는 사회에 포함되었다고 하더라도 나의 행동에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다. 정말로 그럴 것 같고, 자유거래를 보장해주지 않는 국가 내에서 내가 만일 그 국가의 '규범'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다면 나는 타인을 관찰함에 있어서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집단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나는 거리낌 없이 행동할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게 만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어떻게 이와 같은 판단을 얻게 되었는가? 이것은 타인에 의해서 주어진 것은 분명히 아니다. 타인에 의해서 해당 지식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필히 간접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직접적으로 주어질 수 없을 것이다.(왜냐하면 그것은 경유한 앎을 형성할 수 없을테니까, 유일하게 경유할 수 있는 것은 해당 언화행위에 대한 나의 개념적 대응에서만 가능할터인데, 말로 전해지는 지식은 말의 형식에 대한 경유한 앎을 갖는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말과 대응되는 의미의 논리적 관계에 대한 지성적 통찰을 갖지 못한다면, 이를 지각하기는 어려운 문제이다.[나는 이 부분에서 백문이불여일견을 해석한다.{여기서 봄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감각함을 의미한다.}] 말은 떠올리게 할 수 있어도, 실질적으로 개념을 알려주지 못한다. '사과'에 대한 개념을 모르는 사람에게 사과를 말해준다고 하던들 그 사람은 사과에 대해서 알지 못함은 분명할 것이며, 사과의 달콤함에 대해서 설명한다고 하던들 사과를 직접 먹어보지 않고는 사과의 달콤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것이다. )

그렇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감각적' '지성적' '반성적(2부에서 등장할 개념인데 설명하지 않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내가 가지고 있는 판단들에 대해서 재관찰(재인상이라는 말도 사용한다.)과 같은 것이며, 과거의 것을 경유한 앎을 의미한다. 여기서 과거의 것을 경유한 앎이라는 것은 대상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으로 도달해야 할 것이다. (없음 -> 감각적 앎 -> 지성적 앎 -> [반성적 앎, 감각적 앎] -> 지성적 앎 .. to inf) 그렇다면 그것은 필히 '경험적'어야아 한다.

엄밀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을 너무 성급하게 결론 내리는 감이 있는데, 나는 경험적으로 왜 해야함을 습득한다. 나의 판단은 과거의 경험의 재인상과 현재의 '감각적 앎'과 그에서 비롯한 종합적 '지성적 앎'(추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판단의 근거로써 주어진 과거의 '경험'이라는 것 혹은 지성적인 앎이라는 것은 그 다음 판단의 근거로써 재인상됨에 따라서 행동의 경향성을 가져온다. 그것은 '일관적'이지 않지만 '일관적'으로 보이는 감각적인 앎의 속성과 매우 유사하다. 나는 '태어남'으로써 사회와 계약을 맺지 않았지만, 사회에서 '살아감'으로써 사회와 계약을 맺는다. (사람들이 인권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결국 사회에 포함된 개인으로써 가지고 있는 사회와의 계약적 근거로써의 양심에 대한 충분한 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양심이 만들어낸 당위가 그들의 행동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것은 규범성의 효력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 무경험적인 상태에서 경험한 이후에 행해진 판단의 근거는 경험으로 부터 기원한다. 집단 내에서 경험한 사람이 처음부터 자신이 집단과 계약 선택할 자유는 있었다고 생각하나, 사실 이것은 집단 내에서의 경험 이후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단내에서의 포함됨으로써 획득된 지식으로부터 추론된 '계약'에 대한 앎이 과거로 소급하여 계약이 불공정 계약임을 주장할만한 정당한 근거가 되는가 한다면 이는 어려워보인다.

나는 사회라는 것은 결국 규범성의 형식적 토대를 위한 '보자기'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형식일 뿐, 사실은 개별의 의지와 그 의지에 대한 Some x인 규범에 대한 의지의 결합이다. 그 양심을 다룸으로써 강력한 통제력을 획득한다. 그것은 의식적으로든 가시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비가시적으로든 나타난다. 3-2 파트의 사랑함에 대한 예시는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할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종합유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