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이나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에는 공통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 같은데, 그 가운데 중국과 한국의 경우에는 제사를 지내는 양식이 유사하다.

 중국에서는 토속신앙으로 자신이 죽으면 저승의 세계에서 똑같이 생활한다고 생각한다. 그 때 생활하는 방식은 이승의 자식들이 제사를 통해서 지내준 밥이나 떡고물을 먹으면서 연명하는  것인데, 죽은 령도 곧 사람과 같지만 이미 육신을 떠난 몸이라 영만 남아 저승에서는 죽지 않는다.

 이런 령이 제사를 받지 못하면, 굶고 악에 받쳐 악귀가 되는데, 악귀가 되면 환생도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제사를 지낼때 위로 3대까지는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한다.

 이런 신앙의 목적이 인위적인 행정의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혹은 자연발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없는 부모들의 경우에는 이런 이유에서 친족으로부터 아이를 입양하는 경우가 흔하다.


2. 전형적인 부계사회라고 말을 하며 이것이 부정적인 어감으로 쓰여지는데, 남성혈족을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부계사회라고 하는지, 아니면 가정내에서 남성의 권력이 강한 것을 부계사회라고 하는지는 사실 잘 구분하기 어려워 보인다.

 통상적으로 부계사회라하면 권위적임을 말하는 것 같은데,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그것은 전제적 정치구조 하의 가족구조가 갖는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실질적인 부계사회 일반이 모두 그런 특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3. 구규범과 수입되어 온 신규범의 충돌은 기형적인 환경을 창출해냈다.

 과거에 부계사회 일반에서 혼인이라는 것은 여성이 자신의 혈족집단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혈족집단에 일원으로 포함되는 형식이었다. 그 가운데 여성측에서는 지참금을 받거나 혹은 주거나 혹은 그냥 몸만 가거나 하는 세가지 선택방법이 있었다.

 보통 여자측에서 지참금을 주는데에는 다른 가구에 포함될 자신의 여아를 잘 봐달라는데 그 목적이 있고, 여자측에서 지참금을 받는 경우에는 남편측에서 그 여성의 가구에 잘 키워준데에 대한 대가로 주는 경우였다.

 그 가운데 과거의 경우에는 여성이 남자의 집으로 들어오는 구조이기 때문에, 굳이 결혼 이후에 남자측에서는 비용이 발생하지 않았다. 여자는 집으로 들어오면 되는 것이고, 자신의 혈족 가정에서 제공한 혼수를 바탕으로 시부모와 함께 집안일을 잘 이끌어나가면 되는 것이며, 남자는 여자를 잘 먹여살리면 되는 것이다.

 이게 오늘날로 내려오면서, 시집살이에 대한 공론화 등에 따른 문제와 더불어 과거에는 부모가 자식부부와 같이 살면서, 이전의 경우에는 별도로 독립한 하나의 가정을 이루기 전까지는 부모가 자식부부의 양육문제나 거주 문제를 해결했지만, 점차 여성이 시부모와 같이 사는것을 혐오하기 시작한다.

 이런 경향에서 남자는 결혼할 때 여성에게 두가지를 묻는데, 하나는 여자가 시집에 들어와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출을 받든 월세를 살든 전세를 살든 매입을 하든 별도로 집을 하나 구매하여 별도로 사는 방식이 그것이다.

 과거에는 여성이 시집살이를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았다면, 최근에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로 변화함에 따라서 전자보다는 후자의 선택을 하는 경우가 늘어났다는 점.

 그런 가운데 전통적인 책임인 남자는 거주할 곳을 마련하고 여자는 그 가운데 살림을 장만하던 방식에서, 남자가 따로 거주해야할 새로운 집을 장만해야 하다보니 혼인에 있어서 남자의 부담이 증가하는 것.

 여성운동가들에 의해서 호적에서 형식적인 부계구조가 폐기되고 법 앞에서는 평등한 구조가 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가족제 사회의 전통인 남자가 집을 마련하고 여자가 혼수를 마련하는 것이 유지되고 있는 것.

 한국에 태어나서 거주하는 사람이 서구의 변화한 혼인풍습과 한국의 그것을 비교함에 따라서 남성들도 기존의 가족제 전통에서 출발한 전통을 지켜야 할 이유는 없어지는 것.

 이런 가운데서 남자가 집을 장만하고 여자가 혼수를 장만하여 결합한 부부의 경우에는, 남자집안에서는 당연히 시집살이 문제가 제기될 수 밖에 없어 보임.

 

Posted by 종합유추

1. 유병언이네 회사는 박근혜 전부터 있어왔다. 비슷한 행태가 얼마나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1999년경부터 활동했던것으로 보아서 2년동안만 활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책임의 문제가 전적으로 박근혜에게 귀속되기 위해서는 전대 행정부 혹은 전전대 행정부와 전혀 독립적인 박근혜 정부와의 커넥션이있었어야 박근혜에게 문제를 귀속시킬 수 있겠며. 박근혜 행정부때 관련 조직기관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행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으며, 조직기관의 인사에 박근혜 수뇌부에 직접적인 연관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입증되지 않으면 박근혜 정권에 책임을 귀속시키기 쉽지 않을것.

 

2. 책임문제는 굉장히 중요하다. 자신이 엄격하게 책임질 부분과 책임지지 않을 부분을 구분하여 말하는 것이 필요하고. 책임지지 못할 부분에 대한 약속은 하지 않는것만 못하다. 혹자는 그럼에도 대통령이기 때문에 책임지는 어투로 말해야한다는데, 안전이란것을 완벽하게 성취할 수 없다는 점에 미루어보아 애초에 언제는 사고는 발생할 수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약속했다가 나중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데다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신뢰없는 정부가 될 바에야 처음부터 말을 하지 않는게 최적이다.

 

4. 신참 회계사도 처음 직무 맡으면 아무리 잘 배웠어도 3년은 굴러야 제대로 된 업무를 한다. 이건 변호사도 마찬가지고 의사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숙련된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제 실력을 발휘하기 까지에는 업무와 관련해 습득할 것이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도대체 정부 바뀌면서 장관 몇번 바뀌었고 직속 부서 몇번 바꿔놨는가? 대통령 임기 길어야 5년이다. 아무리 뛰어나도 2년은 있어야 자기 위치를 파악하고 업무능률이
향상된다. 빨라야 처음 부임하자마자 2년쯤 되어야 본격적으로 업무를 진행한다는 것. 중반에 바꾸면 익숙해지기도 전에 임기 끝나고 퇴임한다. 말 그대로 쉬운게 아니다. 도대체 몇번 장관 총리 교체해야하나? 적당히 좀 해라

이건 국가의 합리적 의사결정을 전면적으로 방해하는거 아닌가? 국가가 결국 망했으면 좋겠나? 도대체 누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가?

 

5. 저널리즘? 신성한 기자의 의무? 독립잡지? 의사결정 혼란만 가져온다. 알 권리를 증진시키기는커녕 정보 하나 구하기 힘들어서 자극적인 기사 찍찍 써내는게 저널리즘이라면 나도 내일부터 신성한 저널리즘 지켜가며 말하는 훌륭한 기자가 될지도 모른다.

전문가도 쉽게 결정내리지 못하는 사안에 대해서 기자라고 말을 찍찍 내뱉는다. 사실 관계는 또 얼마나 검증됐는가? 그래 그게 중요하던가. 많이 읽혀지는게 중요할 것. 장인정신? 기자정신 필요없다. 그
것은 인기로 상쇄된다.어떤 찌라시에는 의학저널에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이해 전혀 안 되는걸 마지막 결과만 딱 짤라서 인용해놨다.

이건 특히 모욕죄에서 심각하다. 사실관계? 안 본다. 법리? 안 본다. 자극적이면 된다. 판사는 법리에 맞춰 엄격하게 판단했으나 사실과 판시사항이 자극적이면 된다. 게임에서 욕하면 무조건 고소가능하다? 그래 고소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죄확정은 다른 부분이다. 전후 맥락 다 생략하고 판결이 있다 이야기한다. 얼마나 자극적인가? 그게 기자라면 나도 내일부터 금감위가서 사례만 잔뜩 모아서 글을 내면 되겠구나.

차라리 독립잡지같이 영 이상한 신문 보지 말고. 변호사신문 법률신문과 같이 전문가들 집단 신문을 봐라. 그게 유익하다면 더 유익할 것이다

7. 부모는 산에 묻고 죽은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 했다. 죽은 사람을 대체로 사람들을 잊으려 노력한다. 세월호 때문에 자식을 잃은 부모들 마음이 얼마나 애타겠냐만은, 도대체 누가 근 1년동안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이가 죽었다고 마음을 후벼팠는가?, 끊임없이 그들의 아이가 죽었음을 상기시켰으며 그걸 유지시키고 있는가?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 원래 그나마 잘 살던 사람들까지 죽은 사람한테 목 메달게하면서 그 사람들이 말하는건 그게 정의란다. 그게
정말 정의냐? 이건 예전에 이념가지고 총 칼 쥐어주고 가서 싸우라고 했던 그놈들과 뭐가 다르냐. 세월호 희생자들 부모의 업무상 공백으로 인한 경력 단절은 어떻게 할거냐 17에서 18의 아이를 둔 부모는 20에 결혼해도 40이다. 지금 일해야 노후를 보장하는 시점이다. 그 사람 미래는 중요하지 않고 그 사람들을 이용하는 사람은 누구더냐? 또 국가 탓을 할건가? 도대체 너와 나의 국가는 마치 신과 같아서 모든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주는 어머니같은 존재였나? 아니면 너와 내가 세금내서 관리를 담당하는 집사같은 존재였나

어떤 빌어먹을 놈들이 산자의 목숨과 죽은 사람의 목숨으로 국가와 딜을 하고 있던가?

진정 사악한 놈들은 누군 목숨이 달린 경주를 펼치고 있는데, 옆에서 그거 즐기면서 돈 걸고 내기하는 놈들이다.

타인의 아픔을 공감해준다고 하는데 도대체 상대방의 아픔에 대해서 경험한적도 없고. 그 고통이 같은 고통인지 확신도 못하는데 공감을 한다? 예전 현상학시간에 어떤 여자가 인간은 상대방의 고통과 같은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더라. 차라리 공감같은 가식으로 상대방을 위로하기보다는 실질적으로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이나 하는것이 낫다.

그 공감이라고 말하는 빌어먹을 작태는 너무 값싸서 마치 누구에게든 표현만으로도 취할 수 있는 것이라. 마치 공감을 할 때는 감정적으로 부족한 거지에게 적선을 하는 느낌이다. 최소한 상대가 감정을 동냥하는 사람도 아니고 낮은 가치에 값싼 푼돈 하나 던져주며 자신은 마음의 위안을 얻는것이 그렇게 만족스럽고 고귀한 행동인가?

다른 사람의 행동에 고통을 느낀다면 공감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적게하여 희소성을 높혀 표현을 하던가 직접 가서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실천적으로 돕는게 그딴 빌어먹을 말 한마디의 값싼 공감 푼돈보다야 훨씬 괜찮을 것이다

 

세월호를 언제까지 잊지 말아야하는가? 그들의 부모는 계속 세월호를 잊지 말고 그들 자식이 죽은걸 보면서 평생을 고통속에 살아야하는가? 당신의 어머니가 죽었다. 누군가 옆에서 당신에게 1년동안 계속 어머니가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어머니가 죽은걸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심각한가? 이건 정신나간짓이다.
추모는 조용히 하는것이지 시끄럽게 다 외치면서 하는게 아니지않는가?

Posted by 종합유추
전통적인 의미의 순결을 설명함에 있어서 맬서스의 양성제어(positive check)와 예방적 제어(preventive check)에 대한 논의는 세련됨을 넘어서 탁월함을 보인다.

전통적 시스템의 한 부족내에서 존재하는 인구의 숫자는 그 부족의 존속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이었다. 토지에서 나올 수 있는 생산성은 한정되어 있고 구체적인 피임의 방법 자체가 마련되어있지 않던 그 시절에 청춘 남자와 여자를 한 방에 몰아넣고 10개월이 지난 뒤에는 최소 3명 이상의 사람이 되어 나올(임신에서 쌍둥이까지 생각하라) 가능성이 크다고 맬서스는 밝힌다.

맬서스는 그 가운데서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과 유사한 개체를 만들어내는 번식욕구를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그런 전제는 많은 부족 집단 혹은 국가라는 시스템 하에서의 행정구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고, 소속된 사람들은 종종 그들의 주변 생산성이 버틸 수 있는 최대치만큼의 자손을 갖곤 했다. 그 가운데서 맬서스는 인구의 수가 가져오는 두가지 양상인 양성제와 예방적 제어를 말한다.

여기서 양성제어라함은 기근 혹은 좁은 밀도에 높은 인구가 몰아 살면서 발생할 수 있는 일종의 전염병과 같은것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인구가 줄어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의미하고, 예방적 제어라함은 그 가운데 그 집단의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규칙을 정하여 전체 집단의 인구의 수를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것이다. 

식물의 생산에 있어서 고전적인 야생상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집단의 경우에는 예방적 제어에 비하여 양성 제어의 가능성이 크게 나타난다. 매년 수확량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확량이 좋은 시점에서의 사람들은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낳고, 수확량이 좋지 않은 시즌이 다음해에 닥치면 사람들은 모두가 같이 굶거나 혹은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거나 혹은 다른 부족과 전쟁을 하여 다른 부족에서 양식을 약탈하거나 혹은 인육을 섭취하는 방법을 채택한다. 

그에 반해 예방적 제어의 방법은 그 인구의 숫자를 규범이라는 이름하에 자체적으로 조절하는 것이다. 대개 이런 형태의 규범은 그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장로나 혹은 연장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데, 무조건 많은 아이를 낳는것을 금하기 위하여 남자와 여자를 일정나이까지 결혼을 못하게 한다거나, 혹은 남성을 고된 노동으로 혹사시켜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동시에 성욕을 감퇴시키고. 집안에서 가사를 담당하는 여성의 경우에도 같이 밖에서 혹사를 시킨다거나 아니면 여성의 성적인 쾌감을 느끼는 음핵을 어린 나이에 절제하는 것을 일종의 규범으로 만듦으로써 여성의 외도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배제하고 부부사이에 별도의 욕정의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금하여 근면성실하며 동시에 적은 인구의 출산을 목적으로 한데에 있다 하겠다.

언듯보면 굉장히 야만스러워보이지만 인구의 수를 조절함에 있어서는 그것은 정말로 탁월한 방법이었고, 이런 규칙을 지키지 않는 부족은 필연적으로 양성제어를 맞게 됨으로, 인간의 본능적인 성욕을 제어하여 인구의 수를 줄일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맬서스의 관점에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순결의 개념과 한국내에서의 순결의 개념은 일종의 규범으로써 예방적 제어에 해당할 것이다. 결혼하기 전의 여성에게 순결을 권하고 이를 강요함으로써 결혼이라는 의식을 거쳐야만 그에 따른 아이를 출산하게 되는 방법을 채택하고, 또한 그 가운데서 남성과 여성이 아이를 양육할만한 충분한 능력이 되어야 실질적으로 그들의 아이를 효과적으로 양육하게 만들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에서 남성의 생산성이 담보되어야 하는 것이고 여성은 조신함과 집안의 일을 잘 하는것이 요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물질적 풍요 이후 순결 자체가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왜 오늘날에도 순결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순결시스템이 결혼의 선제조건이 되는 방법으로 그 명맥을 이어왔다고 본다.

이를 1980년대까지 혹은 지금까지 한국에 행해지고 있는 순결과 결혼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조금은 이해해 볼 수 있겠다. 남자는 결혼에 지참하는 것이 집과 적합한 생산성을 가질 수 있는 직업이었고 여성은 그 집안을 구성하는 혼수였다. 이것은 관례적으로 그래왔던 것이고, 그런 전제가 있어야 그들의 아이를 효율적으로 양육할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순결에 대한 것은 결국 이런 물질적 전제가 되어야 그들의 아이를 좀 더 적합하게 기를 수 있기 때문에, 여성은 결혼전에 몸을 함부로 놀려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 아이를 양육하기가 쉽지 않고, 더욱이 그 아이를 사랑만으로 기를 수 없다는 굉장히 자명한 어구는 남자에게도 적용되어 생산성을 갖추는 훈련이 온전하게 되지 못한 남자도 이 부분에 적용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현재까지 행해지고 있고 아직까지 지켜지고 있는 혹은 권해지고 있는 순결에 대한 개념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규범의 원리를 나이드신 분들이 이해하든 혹은 이해하지 않든 그들의 자손에게 혹은 어린 아이들에게 권하는 이유는 어찌보면 그들의 후손이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할 것이며, 이것은 악습이 아니라 오히려 양속의 한 명맥이 닿아 있다 할 것이다. 

물론 이런 반박이 있을지 모른다. 오늘날에는 콘돔이나 혹은 인공낙태와 같은 확실하게 그들의 아이를 낳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해당 방법을 통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때에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며, 굳이 순결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하겠으나, 콘돔도 역시 항상 임신의 가능성을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으며, 여성의 경우에도 끝없이 낙태할 수 있을만큼 자궁이 건강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의 적령에 있는 남성이 여성을 부양할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할 경우 왜 순결한 여성을 찾으려고 하는가 한다면, 그것은 자궁이 건강한 여성을 찾고 자신의 자손이 건강하기를 기대하는 심적 상태일지도 모르겠으며 더 나아가서 순결을 쉽게 지키지 않는 여성이 자신의 몸이나 아이에 대한 책임감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은 사회가 분명 바뀌었다. 과거와 같이 남자가 밖에서 일하고 여자가 집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둘 다 밖에서 일할 수 있는 생산성의 증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한 아이의 양육비용에서 교육비용이 차지하는 부분이 급속도로 증가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과거에는 밥만 먹여주면 혼자 알아서 다 했을 아이, 게다가 집안에서 가사노동을 돕고 농사일을 도왔을 아이가 오늘날에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야만 그 아이가 제 기능을 할 것은 오늘날의 과도하게 커진 교육시장과 암묵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명문대학생에게 요구하는 고액과외와 같은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순결과는 별개로 이런 이유의 쓸 데 없는 과도한 아이에 대한 투자와 그것을 조장하고 그것으로 먹고사는 비생산적인 집단과 출산율 및 결혼율의 감소는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다음 세가지 질문는 던질만하다.

1.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가난을 겪는 이유는 결국 그들의 생산성이 아이를 키우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에게 예방적 차원의 관습이 주어져 있지 않고, 가장 원시적으로 생산량만큼 아이를 출산하는 동물적 욕구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을 때, 그들이 가난하여 밥을 먹지 못함에 연민을 느껴 그들에게 한끼 밥이나 식사를 제공해주는 것은 한정된 생산성에서 자체적으로 결정되어야 할 인구수의 왜곡을 불러오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유니세프의 지원이나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한 지원은 정말로 단기적인 해결만 가져올 뿐 장기적으로는 그들을 더욱 더 괴롭게 만들고 그들에게 지원한 자원을 전혀 무용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는 얼마나 바보같은가?

2. 아프리카에서 아직까지 이행되고 있는 여성할례에 대해서 인권단체들이 야만적임과 미개함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그들이 원래부터 유지해왔던 인구를 조절하는 방법을 전면적으로 상실하게 되어 그들은 다시금 양성제어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여성의 성적쾌감을 위해서 그 부족 전부의 생명을 위협하는 그들의 작태는 정당한가? 

3. 본연의 여권신장을 시위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오히려 이런 측면에서는 여권신장이 되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풍요에 따른 여성의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 및 분업의 해체가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가 모든 아이를 양육한다든지. 
그렇다면 오히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것이 여성으로 하여금 집안에서 업무의 강도를 낮추었고, 그들에게 생식의 분업측면 측면에서는 더 큰 기회를 제공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면적으로 여성 시위가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경제발전을 했기 때문에 여권신장이 얻어진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관계는 엄격하게 논구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종합유추

가장 정신나간 비교중에 하나가 OECD 국가들 중 타국이랑 한국의 제도를 비교하는것이라고 난 자신있게 말하는데. 이 정신나간 비교법학자들은 독일이나 프랑스 그리고 영국의 법을 그대로 계수해오면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줄 안다는 정말 바보같은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다.

몇몇 논문의 근거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도 인정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한국도 해야해요! 라고 말하는 어떤 신선한 분께서 가장 중요하게 착각하고 있는 점은, 많은 한국인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능력에 있어서 취약하고, 타인의 말을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매우 미개하다고 들을 정도로 문제들에 대해서 그 이면을 보려고 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는 점 등과 같은 고질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을 정도다.

일제치하와 6.25을 거치면서 기존의 계승되어 왔던 정신 유산을 상실하고, 뿌리가 뜯긴 사람들이 밑바닥에서부터 새롭게 형성한 정신유...산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말할 수 있는 외부의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흔히 알려진 집단성으로 나타나며 여기서 파생되는 것은 일종의 '과시욕', '집단주의', '물질만능주의'와 같은류의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들이다. 이런 문제는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런 문제를 '전통'의 상실, 다시 말해 쌓아왔던 정신적인 유산 자체를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을 한다. 누군가는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한국의 전통 문화에 대한 교육에서 성취할 수 있다고 말을 하는데, 사실상 정신 유산의 계승은 자손의 계승에서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며, 환경에서 습득한다고 말하는 것이 적합한 것으로 생각된다. (입센의 유령을 보면 이것에 대한 이해가 어렵지 않다.) 단순히 물질 문화를 배우는 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에 내포되어 있는 문화 자체를 습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한국은 미개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외국의 문화를 급격하게 계수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법제가 그런류에 속하는 것이다. 모 헌법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오! 한국은 참 헌법 체제가 잘 잡혀있어요!, 해외에서도 한국을 부러워 한답니다. 한국만큼 헌법 재판소가 잘 기능하는 국가도 없을거에요', 사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들은 생각은, 원숭이에게 인간옷을 입혀놓는다고 그 원숭이가 뛰어난 인간이 되냐는 생각이었다.

이것에 대해서 상천씨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사용한다. '손오공은 6만 5천근이나 되는 여의봉을 쉽게 좌지우지 한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6만 5천근이나 되는 여의봉을 들기 위해, 5천만명이 모여서 지랄맞게 그 여의봉 하나를 들으려고 발악 해야한다. 정신적 유산이 없는 개인은 정신력이 약하다. 분명히 유럽의 국가들의 계승되어 온 유산인 정신적 유산은 누적되었고 그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와는 다르게 한국의 정신적 유산은 빈약함이 분명할진데, 그 빈약한 몸으로 그들이 좌지우지 하는 여의봉을 들겠다는 것은 머저리같은 짓에 다름없다.' 나는 이 비유도 마음에 들고 이 주장도 매우 인상깊어하는 편이다.

법제나 문화라는 것은 결국 인간사회의 틀에 보자기 같은것에 해당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계승되어온 전통의 힘, 다시 말해 정신적 유산의 힘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는 '법제'나 '문화'라는 것을 쉽게 '수용'한다는 것은 손오공이 들어야 할 여의봉을 일반인이 들겠다고 발악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한국식으로 계량한 법'이라는 것은 애초에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중요한 것은 그 도구를 사용할만한 사회의 정신적인 힘이고, 한국은 그런 힘이 부족하다.

비교법학을 논하는 사람들의 대체적인 개소리는 이런 류의 '개소리'에 가깝다.

Posted by 종합유추

이 글은 그다지 엄밀한 논의가 나타나 있지 않음을 먼저 밝힌다.

나는 웬만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성형수술을 하든 말든 상관없다고 말하지만, 대체적으로 수술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편이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외모에 대한 불만족은 일단 현재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충분히 '만족'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불만족'은 정신적인것이 온전히 고려대상에서 배제되며, 보통 자신이 갖고 있는 물질적인 것들의 비교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 나는 외모를 아예 듣어 고치려고 하는 행동은 일종에 자신이 갖지 못한것에 대한 결핍의 증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굳이 '외모'의 문제 뿐만 아니라, 자신감이라고 하는, 타인이 자신을 존중해주기를 원하든지 아니면 타인으로부터 이익을 얻기를 바라지만 나에게 그것에 해당하는 충분한 것이 없는 경우에서 나타나는 '통제하고 싶지만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

성형수술을 하는 행위는 이렇게 자신에게 '결핍'되었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 충족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일상적으로 외모가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주변에 의해서 존중을 받는다던지 무엇인가를 받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서 '상대적 박탈감' 같은 것을 느낀다.

TV를 보고 저기에 있는 저 김태희는 주변의 남자들로부터 선호되고 무엇인가를 받지만 나는 왜 그렇지 못하는가에 대한 불만족 같은 것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으며, 장동건과 원빈은 순전히 잘 생겼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영화 촬영에서 쉽게 돈을 벌고 그다지 고생을 하는것 같아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경우는 왜 그렇게 쉽게 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불만족이나 강한 질투와 유사한 것이라고 말하겠다.

이런 사람들이 보통 성형수술을 하는 과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사용한다 '나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 성형수술을 했다.' 아 물론 맞는 말이다. 현재 상황에서 느껴지는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성형을 하고 이를 통하여 자신도 그들과 같이 좋게 대우 받기를 위한 과정에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것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다음의 문제의 상황에 직면 했을때도 같은 방식으로 해당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처음 수술한 사람의 경우, 갑작스럽게 변한 외모는 타인들에 대해서 호감을 사고 자신이 생각하던 김태희나 원빈과 같지는 않겠지만,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그 전에 가졌던 자존감의 상실이나 박탈감을 해소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사람들의 대우에 익숙해진 그 사람은 뭔가 다시 또 허전함을 느낀다. 다시 또 TV에 나오는 사람들의 대우에 대해서 박탈감을 느끼고 자존감의 부족을 느끼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 다음부터 크게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시 또 '성형'을 택한다. 자신의 정신적인 소양을 개발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며 그 방법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쉽게 쉽게 얻을 수 있는 성형이라는 수단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바로 사람들을 성형중독으로 빠뜨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각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자신있게 내세울만한 것이 없고 그렇기에 타인으로부터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비교적으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과 형식과 직위를 가져다가 스스로의 몸에다 가져다 붙인다. 마치 이것은 장군들이 몸에 다는 휘장과 같은 것으로 개인들에게 작용한다.

성형을 하게 만드는 요인이 자존감의 부족이라고 할 때, 이렇게 성형을 하는 행위는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성형의 중독에 빠뜨리게 만들 상당한 근거가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성형'을 그다지 권하지는 않는다.

Posted by 종합유추

어렸을 때 아버지하고 어머니와 같이 63빌딩에 있는 레스토랑에 몇 번 간적이 있다. 방금 피곤해서 누워있다가 문득 그 상황의 정경이 떠올랐다. 서로 같이 짝지어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약한 소란스러움과 함께 감미로운 음악이 들려오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야경은 검디검은 밤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던 별들과 같이 화사하고도 도시적이었던 것 같다.

1990년대 당시에는 그다지 음식의 다양성이 없어 코스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샐러드에 메인디쉬 정도의 식사였고 아마 내가 관심있었던 음식은 간단한 육류 중심의 음식. 일식은 내 고려사항에 없었던 것 같은데, 고급음식으로 여겨졌던 초밥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던것은 내 기억상 2000년대 즈음이었던 것 같다.

레스토랑은 크게 두 종류로, 하나는 부페식이었던 것 같고, 다른 하나는 코스식이었던 것 같다. 부페식의 특징은 따뜻한 조명이 비추고 있는 불빛 아래 전형적인 음식의 온도를 맞추기 위해서 잘 장식된... 알류미늄제 은색 그릇이 있었다. 그릇을 열면 주홍불빛이 음식을 비추고, 그런 그릇이 줄을 이루어 기다란 식탁위에 나열되어 있었다. 마치 보석상의 진열장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으로 그 음식은 달콤해 보였고, 세련되어 보였다. 가깝게 붙어있던 탁자와 탁자는 사람들의 친구들끼리온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던 연인의 이야기들이 나에게 전해지는 듯한 소란스러움이 있던 곳이었다.

그에 반해 코스식 레스토랑은 그 분위기에 맞추어 식탁과 식탁간의 거리를 조절해 마치 거대한 홀 안에 들어와 여유롭게 홀로 음식을 즐기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던것만 같다. 사람들에게 식사를 운반해주는 종업원과, 당시 레스토랑의 전형적인 인모장판으로 깔려있던 바닥의 느낌, 전형적인 4인탁자와 알 수 없는 가죽문양으로 둘러쌓인 소파는 그 느낌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던것 같다. 그 공간은 마치 나와 나의 부모님만을 위해서 준비된 공간과 같은 느낌을 주었고, 그 가운데의 '잔잔한 음악'은 부페식과 다른 아늑함, 고요함, 고풍스러움, 세련됨을 느끼게 했던것 같다.

당시의 추억을 나는 지금은 온전히 상기할 수 없다. 당시에 들려오던 노래의 이름도 지금은 잘 모르겠으며, 당시 먹었던 식사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지금 그리운 것은 그 분위기. 따뜻하거나 혹은 세련되게 나를 비추고 공간의 느낌을 주었던 그 곳. 때로는 왁자지껄한 휴양지의 호프의 느낌을 나게 해주었던 혹은 그 분위기에 취해 음식을 차분히 즐길 수 있었던 그 곳.

더 이상 그 레스토랑은 있지 않겠지만, 오늘 나는 문득 그 레스토랑에 누군가와 같이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곳에서든지, 그 차분하거나 왁자지껄 했던 63빌딩 레스토랑의 기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누군가'와 말이다.

Posted by 종합유추

아까 우연치 않게 상천씨의 글에 '전쟁은 매우 예술적이다.'라는 말을 남겨서 아마 '김효영 얘 또라이 아니야?'라는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왜 내가 전쟁이 미학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현준이 형과의 대화에서 나온 나의 간략한 이야기를 남긴다.

나는 전쟁을 일종의 다른 방식의 축제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그 자체의 속성만을 따져본다면 대체적으로 전쟁은 매우 비극적이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매우 비인간적이며, 규범적인 것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것으로 규범에 맞추어 나는 생각한다. 전쟁이라는 것은 통상적으로 발생했을 때 매우 끔찍하며,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 가운데 개인은 스스로의 인간성을 상실한 채 살인기계가 되어 살인행위를 반복하거나, 혹은 죽음이 두려워 스스로의 판단 능력을 잃어버리고 공포에 질려 벌벌 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한 인간답지 못하다. 전쟁은 분명히 예방되어야 한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은 지지를 보낼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반하지 않는 내가 왜 '전쟁'이 다른 방식의 축제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간략하게 말을 하자면, 전쟁의 발발은 곧 평상시에 비해서 더욱 끔찍할 정도의 비극들이 탄생하고, 부와 풍요를 상징했던 것들의 그 속도를 알 수 없는 탕진이 발생하며, 그것은 이성을 통하여 그것의 '합리성'을 고려하는 효익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쏟아버리고, 태워버리고, 파괴하는 원시적인 축제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세 가지의 관점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전쟁 자체에 물질적인 성격이 가지고 있는 탕진의 표현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축제기간을 위해서 사람들은 근 1년간 축제를 준비한다. 재물을 축적하고, 굳이 힘든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축제기간이 되는 순간 그들은 그동안 축적했던 재물을 아낌없이 쏟아 붇는다. 그리고 그것을 쏟아부으면서 그들은 축적한 술을 꺼내어 서로 과도하게 나누어 마시고, 고기를 구워 마치 걸신이라도 들린듯이 그 고기를 뜯는다. 그런 탕진의 행위를 하면서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광란에 가득찬 춤을 춘다. 그것은 마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빠르게 소비하면서 파괴라는 광기를 '즐기는 것'만 같은 느낌을 관찰자에게 주는것만 같다. 이것은 인간의 야성을 매우 잘 표현하는 것만 같다.

나는 전쟁을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전쟁을 위해서 국가들은 많은 축적한 자원들을 일시에 풀어놓는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력을 상대하기 위해 그들은 엄청난 수의 '총알'을 만들고, '총'을 만들며, '대포'를 만들고 '폭약'을 만들고, 그들의 노동력의 근원인 국민을 동원한다. 마치 전쟁이라는 하나의 것에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엄청난 자원을 일순간에 쏟아부으면서 그들 스스로를 표현하고 그들 스스로의 위치를 타인에게 보여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과 머신건의 총알을 연발하면서 나오는 '타타타타'의 탄피소리와 그 냄새, 그리고 곡사포의 굉음을 동반하는 대포소리와 그 전장의 모습은 마치 그 탕진이라는 추상적인 목적을 시각적 청각적 후각적으로 동시에 보여주는 듯한. 그리고 그것들이 '파멸'이라는 목적지를 향해가고 있는 미친 경주마의 질주를 연상케 한다. 이것은 축제에서 보이는 인간의 야성과 그 모습이 닮아 있다.

첫번째 관점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관점이었다고 한다면, 다음의 두가지는 전쟁이라는 비극이 가지고 있는 예술성이라고 말을 하겠는데, 하나는 전쟁 안에서 다른 하나는 전쟁과 관계되어 발생하는 것이다. 전쟁 내적인 것으로는, 그 전쟁안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모습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전쟁에 동원된 사람들은 전쟁에서 선택의 갈등을 겪는다. 과거부터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배웠던 사람들은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고,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규범을 포기하여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 발악할 것인가, 아니면 규범을 준수하여 자신의 목숨을 죽음의 한복판으로 내던질 것인가. 이것은 마치 1900년대 초반의 독일 청년들의 자살열풍을 상기시킨다. 전쟁이 몰고온 비인간성에 좌절하여 자신의 합리성에 대한 정체성을 찾지 못한 젊은이의 자살과, 그 정체성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고통에 몰아넣고 자학하다가 결국 자살에 이르고야 만 사람과, 그런 사람들의 전기를 쓰면서 그 고통을 기록하다가 스스로 슬픔에 빠져 자살을 하게 된 사람. 이것은 마치 아름다움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끊임없는 고통을 감내하던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과 절망적인 사투를 보이는 것만 같지 않으며, 이것이 어찌 아름답지 않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다른 하나는 전쟁이 불러오는 생활세계에서의 비극이다. 윤흥길의 「장마」를 상기하라, 윤흥길의 장마에서 삼촌(빨치산)과 외삼촌(국군)은 서로 죽여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는 두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외가와 친가의 모습은 처음에는 서로가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각자의 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모습이 드러난다. 하지만 외삼촌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게 되자, 외할머니는 모든 빨갱이가 죽어야 한다의 논조로 저주를 퍼붓게 되고, 친할머니는 외할머니와 사이가 나빠지게 된다. 그 이후 친할머니의 아들인 삼촌의 죽음을 상징하는 구렁이가 집안에 들어오게 되고, 친할머니 역시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마지막에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를 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기존에 한국인들의 규범이었던, 가족간에서는 서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은 가장 원시적이고 어겨서는 안 되는 규범이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선택할 수 없는 외부의 조건에 의해서 어겨지게 되는, 선택하는 딜레마의 상황조차 오지 않는 순간에 도달하게 되고, 그것의 분노가 서로와 서로를 향하게 된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온전했던 가정속에 불화가 싹트고 극에 치닫는 순간, 그 작품의 등장인물인,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전통의 입장을 준수하여 서로의 심정을 서로 다스리고 그 문제에 타협을 봄으로써 그 엄청난 낙차와 함께 Peripeteia를 발생시킨다. 이것은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삭혀내고 그것을 승화하여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사건들을 그들의 선택으로 극복하고 규범을 되살리는 가히 '성스러운 모습'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위와 같이 나는 전쟁이라는 것은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전쟁이 발생한다면, 전쟁이라는 것이 가지고 오는 것은 혼돈이고, 뭉쳐있던 규범이라는 거대한 에너지가 일순간에 파괴되고, 그 인간들에게 선택의 문제를 보여주며, 그 인간들이 딜레마의 상황에서 선택을 함으로써 기존의 규범에 근거한 성스러운 모습을 보임으로써 다시금 '강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질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보았을 때, 전쟁이라는 요소는 오히려 축제라는 단기적인 것들에 비해서 더욱 더 강력하고 위대한 아름다움을 물질적인 방식으로든 비극적인 방식으로든 정신적인 방식으로든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근거하에 전쟁은 비극적이지만 예술적이라고 말을 한다

Posted by 종합유추

1. 판례에 근거하여 일관성 있는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법학자의 소신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판례의 해석 자체도 분명히 의미가 있는데, 이것을 적용하는 이유가 만일 순전히 '경제성'이나 '논리적 일관성'을 위해서라면 그것은 적절하게 설명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법을 집행하는 자라면, 성문으로 된 법은 필연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 것이며, 항시 매 상황에서의 '판단'의 한계적임을 인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법학자는 '어떻게 현상을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하여, 자신의 지식에 근거한 최대한도의 적절한 현상 분석을 해내고 이에 합당하게 규범의 적용을 해내어야 할 것이다.

만일 기존의 판례가 보여주는 바가 그 정당성에 있어서 의심할 여지 없이 매끄럽게 제시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참조하는 것은 물론 문제가 없다. 하지만 정당성에 있어서 의문을 제기할만한 여지가 있다면, 그 판례를 보완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해야함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내가 보는 판례를 따르는 이유는 단순히 경제성이나 일관성이 아니라, 판례에 제시된 논리적 추론과정이 매우 긴밀하고 비록 한계적이나마 현실을 잘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하겠다.

그 과정에서 법은 규범의 집행으로 기능을 하지만, 규범과 온전하게 일치하지 않음을 주의깊게 생각해야하며, 쓸데없는 자기연민으로 법의 행위를 그르치는 것은 법을 집행하는 자로써의 '자격미달'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것은 법학자가 아니라 법학자와 다른 이질적인 것이 결합한 키메라다. 순수 법관이라고 말할 수 없다.

2. 나는 오랜기간 법을 공부하지 않아서, 법의 심도있는 이해가 있지는 않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이재상 선생님의 책을 보며 감탄을 하고, 혹은 여러 법철학자들의 해석에 대해서 감탄을 하며,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을 상상하며 더욱 스스로를 채찍질하려고 하는 편이다. 인식의 토대일반이 구조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학문이든 그 학문은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어떤 법해석도 사실상의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다.

화재가 난 가옥 안에 있어 빨리 탈출해야 자신의 목숨을 구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어떠한 방법이 제일 안전하고 상처없이 나가는가에 대해 긴 시간 고민하는 것은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본다면 그 사람은 바보같다고 사람들이 일컬을 것이다. 어떠한 방법을 택해야 그 재난 가옥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가의 문제는 화재현장이 아닌 곳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법학이 직면한 재문제들에 대해서도, 사실상 긴급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선택에 직면하게 되고 그 선택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한계적 합리성을 이용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한계적 합리성에 얽메여 매 순간의 선택을 현재의 변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과거의 한계적 합리성만을 그대로 따르려고 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하겠다.

3. 약 20 분전에 조국교수에 대해서, 그 사람은 살아 행동하는 실천지성이 아니라, 흑화한 실천지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뭐 논란이 될만한 평가라고 보기 때문에 해당발언은 철회힌다.

4. 어제 김민석이가 했던 말에 약간의 보강을 해주자면, 2차 세계대전 전쟁 발발의 주범은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것을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히틀러'를 떠올리며, '히틀러가 주범입니다!'라고 말하겠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행위의 책임을 물음에 있어서 개인의 행동에 의해서 발생한 문제에 대한 책임은 개인의 행동으로 '귀속'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면 도둑질로 인해서 물건의 장소가 이동되었다고 한다면, 그 결과에 대한 통상적 원인은 '도둑질한 개인'이다. 개인의 행동을 넘어서 집단의 행동으로 인해서 발생한 '문제'에 대한 책임을 귀속시키는 것은 그 집단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사실상 어렵다. 예를 들어 전쟁과 같은 경우는 다수의 집단 행위가 동반되고, 그 전쟁에 동원된 개인들은 모두 개별적인 사건을 발생시키며 각자가 각자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을 '우두머리'나 '허수아비'가 진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대타 내세우기에 지나지 않으며 단순한 형식적 관계로 인해서 책임을 지지말아야 할 사람에게 과중책임을 지우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히틀러도 이와 마찬가지인데, 전쟁을 비롯한 전쟁의 모든 결과의 책임이 히틀러와 하이히만 괴벨스에게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논리적 비약이다. 쉽게 단언하여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나는 본다.

 

Posted by 종합유추

이 글은 단순히 내 소견이고 온전한 사실에 대해서 진술하는 것이 아님을 글을 쓰기에 앞서 명시한다. 논리상의 결함이나 혹은 더 설명력을 가진 '제안'이 아닌한에야 답장은 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고 보통 말을 하는데, 사실 이 관점은 좀 애매한 부분이 있다. 과거에는 원시적인 의미에서 '사람을 죽인 사람은 그에 합당한 죄책인 사형을 받아야 한다.'라는 주장이 있었다. 이것은 흔히 복수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근대적인 의미에서 따진다면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꼭 그 사람이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필연적 연관의 논리는 부정된다. 위험하지만, 나는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3편 자비로운 여신들에는 현대적 의미의 규범 그리고 법에 대한 상징적인 배경이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중 2부작에서,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아가멤논'을 살해한 자신의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자신의 합당한 이유...로 살해한다. (사실 오레스테스가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 근거에는 단순히 아버지를 위한 복수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자비로운 여신들의 초반부에서, 아테네의 법정에서 자신의 구형 문제를 두고 구규범을 상징하는 복수의 여신들과 아테네의 중재하에 '재판'을 신청한다.

이 재판은 인상깊다. 재판 초반부에 오레스테스는 자신이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천병희 역, 자비로운 여신들 § 587) 이에 대해서 복수의 여신들은 그는 사람을 살인했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죄책을 받아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 그는 '친족살해'라는 저질러서는 안 될 끔찍한 죄책을 범했음으로 그 죄책은 더욱 크다고 말을 한다. 이 부분은 앞서 제시한것과 같은 '복수법'의 느낌을 강하게 준다. 여기에서는 '끊이지 않는 가정의 불화'라는 말로 복수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사람을 살해함'이라는 사건이 복수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매우 상징적이고 적합한 비유라고 나는 바라본다.

*사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가멤논의 가정사를 좀 이해해야 한다. 오레스테스의 아버지는 아가멤논, 그의 할아버지는 아트레우스이고, 그 아트레우스의 형제는 튀에스테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튀에스테스가 아트레우스의 부인과 정분이 났다는 사실을 인지한 아트레우스는 튀에스테스의 아들들을 잘 구워서 튀에스테스에게 대접하고, 맛있게 튀에스테스가 그 아이들을 맛있게 먹고나서 아트레우스는 '너는 너의 아들들을 먹었어 맛있지?'라는 말을 튀에스테스에게 말하고 튀에스테스는 아트레우스를 저주한다. 그리고 튀에스테스는 (기억으로는) 그의 딸과 관계를 맺어 '아이귑토스'를 낳고, 그 아이귑토스가 아가멤논의 부인인 클뤼타이메스트라와 정분이 나서, 교묘한 계략으로 아가멤논에게 복수를 한다.

요약하자면 아트레우스(아트레우스 부인의 정분남) -> 튀에스테스(튀에스테스의 아들들을 구워 삶아 먹음) -> 아트레우스(아가멤논의 살해) -> 튀에스테스(클뤼타이메스트라의 피살) 의 형식으로 복수를 주고 받은 격이라고 말할 수 있고, 만일 여기서 오레스테스에게 다시 그 복수의 방향이 돌아가면, 그것으로 인해서 끊이지 않는 '복수'가 이어지는 것이 되므로, 복수의 연쇄는 인간 문명에 굉장한 위협이 된다.

하지만 아테네의 법정은 그 복수의 연쇄의 단절을 행한다. 아테네는 설령 살해를 했다고 하더라도 왜 했는가에 대한 따져 물음을 행한다. 사실 이 과정에서 오레스테스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변호한다. '살해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형법 제 12조 강요에 의한 행위), '자신은 죄를 사함을 받았다.'가 그것이다. 이 이후에 11인인지 아니면 10인인지 분명하지 않은 재판에 해당 '사안'을 표결에 붙이고, 그 과정에서 가부동수로 오레스테스는 사형을 면하게 된다.

비록 마지막에는 판사의 '견해'이기 보다는 다수에 의한 견해에 의해서 판결이 난 바 있기 때문에 판사의 위치에 있는 아테네의 논리가 잘 드러나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꽤 아쉽지만, 오레스테스가 제시한 "살해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아레스'의 강요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다." 라는 발언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책임조각 사유. 형법 제 12조에서 '강요에 의한 행위'가 입증되었을 때, 객관적- 주관적 조각사유에서 설령 위법성(예를 들어 살인이나 과실치사)이 징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의 문제에 있어서 순수하게 자신의 '의사'로 인해서 발생한 살인이 아닐 경우, 그리고 그것을 규범적으로 예방가능하다고 사료되지 않을 때, 위법성이 인정된 바 있는 '죄책'을 조각한다. 라는 것과 맥락을 같이하고, 이에 대해서 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본다면, 엄격한 사실관계하에서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 '객관적 귀속'을 비록 규정되지 않았지만 따져보았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따져 물음'에 대한 문제가 잘 논거된다면, 설령 사람을 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동은 정당화 될 수 있기 때문에, 따져 물음의 과정에서 그 행동의 정당성이 구조된다면, 그 사람의 죄책은 조각된다. 하지만 이 따져물음의 과정에서 그에게 '책임'의 소재가 있다면 이것은 조각되기 어렵다.

어떤 사람이 살인 행위를 저질렀다. 살인 행위를 유발시킨 소재의 책임이 만일 자신에게 있다면 그것은 조각 사유가 되지 않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정당한 이유에서 사람을 살해했다면, 이것은 조각되어야 함이 분명하다. 살인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정당화 되지 않는다고 말하나, 행위의 살인이 아닌 행동의 살인은 정당화 될 수 있음에 분명하다고 나는 본다.

Posted by 종합유추

1. 사망 후 염습 및 입관, 발인 후 화장장에서 화장까지 끝나고 유골함을 매장하고 돌아왔습니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장례식에서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하고 지금은 수익-비용 계산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와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냅니다.

2. 누군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슬프기 보다는 한번도 슬픈 기색을 보인적 없던 사람이 눈시울을 붉히며 입술을 부르르 떠는 것이 더욱 안쓰러웠습니다. 절차에서 몇 번이고 슬픔이라는 것이 없었던 사람의 얼굴에 슬픔이 자리 잡았습니다. 슬픔을 보이기 싫어 얼굴을 이리저리 비틀어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어색하기도 하덥니다. 항상 사람이 강할수는 없나 봅니다. 그분의 얼굴을 보면서 친구의 죽음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슬픔'이라고 하기 보다는 고통이라는 감각에 가까웠던것만 같습니다.

단순히 대상에 대한 '상실감'이라고 그 고통을 표현하기에는 그것은 이해하기 전에 너무 직관적으로 다가오며 더욱 격정적입니다.... 단순히 형용이 없는 상실감으로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어색합니다. 그것은 격정적인 상실감이라고 부르는게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장장에서 들리는 다른 사자(死者)의 가족들이 울부짖는 외침등과 같은 것은 기존의 울음과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외치는 전신으로 외치는듯한 메어지는 듯한 울음소리는 마치 날카로운 화살촉과 같아 듣는 사람들의 고막을 통해 정신을 찢어발기고 짓이깁니다. 아마 그런 울부짖음을 들은 사람들은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고통에 의해 유발된 행동에 의해 고통을 강요당하는 상태에 놓입니다. 하지만 이는 가장 직접적인 표현방법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동물적인것 같으며, 그렇기에 곡소리는 그 나름의 표현이 목적으로 하는 전달의 효율성에서 미학적인 듯 싶습니다.

3. 어렸을 때 죽은자를 위한 굿을 소재로 다룬 예술작품을 본적이 있습니다. 2시간 30분 가량 테이프에는 계속 웅얼웅얼 거리는 나이든 노인네들의 굿에서의 소리가 들립니다. 아마 그 작품이 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그걸 본 저는 그것이 재미 없다는 사실을 생각했던 것만도 같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천주교이신지라 미사를 드리는데, 그 미사를 드리러 오는 분들 중에는 젊은 사람들이 없었고, 대게 70 주위의 노인들이 그 미사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족들이 가운데 있고, 그 주위를 노인들이 둘러싸고 미사를 드리는 것을 들었을 때, 저는 그 미사에서 과거 그 굿에서와 같은 노인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이미 살아온 날이 훨씬 많은 나이든 노인네들의, 그 산송장들의 목소리는 생동감이 없습니다. 낮고 생동감 없고 균일한 그 목소리들은 마치 죽은자를 위해 부르는 죽은자들의 노래와 같습니다. 얼마안가 죽음을 준비해야 하며, 다가올 죽음이 두렵고, 죽음을 맞이할 자신이 없고 두려운 자들이 한결같이 부르는 죽음의 노래는,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절대자를 노래하는 시체들의 노래와 같습니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노래, 아마 그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죽음에 대면하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시청각적인 표현과도 같은 것 같습니다. 그들의 말에는 확신이 없습니다. 말만을 들어보면 그들은 죽음을 극복한 것 같으나, 죽음에 대해서 극복했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절대자에 대한 확신이라고는 목소리에서 찾기 힘듭니다. 그저 그들은 절대자가 있기를 바라며, 믿지만 믿지 못하는 자들의 목소리와 같아 죽어있습니다.

장례미사에 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나이든 노인인 이유는 아마 나이든 노인들이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죽은자들을 위해 노래하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위한 방법으로 미사곡을 부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그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며, 죽음을 어느 순간에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이미 죽어 있지만 곧 죽을 사람들로써 죽음을 위한 구원의 노래를 부릅니다. 아마 그들은 노래를 부르는 행동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구원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4. 상대방에 대한 익살은 상대방의 상황을 보아, 그 농이 그다지 치명적으로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임을 고려해가면서 해야합니다. 그렇기에 대체적으로 좋은 익살은 자기비하이며 단순한 방식으로 행해집니다. 하지만 농이 정황상 상대방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올 때, 그것은 농이기보다는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 가까운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계속 농을 상대방에게 던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농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꺼림직합니다. 그런 사람은 익살을 사용한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을 도발하는 것과 같아. 그다지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Posted by 종합유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