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최교수님이 '한국은 미래에 어떤 산업으로 가야할까요?'라는 물음에 대해서 '관광산업으로 가야 합니다. 외국인을 위한 카지노도 육성하고 그래야 해요.'라는 말을 하신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하면 정치적으로도 중국 미국 일본 등에 종속될 수 밖에 없고 국제 경기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을텐데 생산을 포기한 상태에서 순전히 타국가에 의존하겠다는 발상은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해봤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해가 갈것만도 같다.

과거에는 국민성을 부정한적이 있었다. 지금은 국민성이라는 것이 비가시적이라고 하더라도 어느정도 실체는 있는것 같지않나 싶다. 같은 사람사는 사회라고 하더라도 그 사회특성과 문화에 따라서 형태가 천차만별인 것 처럼 한국에는 그 구성에 다수를 이루는 한국 특유의 국민성 같은것이 있는듯

근면함과 검소함 그리고 성실함은 빼놓을 수 없는 미덕 중에 하나이다. 이 세가지는 성취하기 매우 어렵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임에는 분명할테지만, 해당 부류가 많은 집단일수록 그 안정성은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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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식의 가격이라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해당 주식에 대한 '거품(시장에 대한 정보의 차이와 투기욕구)'과 '해당 기업의 가치 + 미래 배당성향의 현재 가치'로 결정된다. 그 가운데 주가가 급격하게 변동한다는 것은 '피상적'으로는 해당 기업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징표한다. 그 가운데서 유사업종에 종사하는 기업들 가운데 주식의 가격이 눈에 띄게 상승한다거나 그에 반하여 경쟁기업의 주식가치가 급격하게 하락하는 경우에는 관련 제품 경쟁에서 특정 기업의 시장장악력이 급격하게 상승한다거나 그에 반하여 경쟁기업의 고객 방어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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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의 경제구조는 사실 굉장히 독특하다면 독...특한 구조라고 생각한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한국은 수출제조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체제'를 취하고 있는데, 제조기업이 제품의 수출을 통하여 해외로부터 달러를 들여오면 해당 자원을 임금과 투자, 기부, 광고 등과 같은 명목으로 자국민에게 순환시키고, 내수시장에 대기업이 제품을 판매함으로써 그에 대한 대가인 화폐를 수취하여 다시금 대기업에게 자원을 집약하여 좀 더 경쟁적으로 타국과의 경쟁을 가능하게끔 만들어주는 일종의 '보호무역'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나는 본다. 같은 이유에서 나는 '한국이 삼성공화국이다.'라는 말을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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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이런 방법과 같은 경우에는 국가가 특정 기업에 너무 의존적이 되고 해당 기업이 국가의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국가 경제가 기업의 경영에 큰 영향을 받을 수 있고, 굉장히 하이리스크를 부담해야 한다고 보나 그만큼 한국은 기술개발등과 같은 하이 리턴을 통해 그 대가를 누려왔다. 해당 상태는 국가의 특색을 반영한 하나의 '상태'일 뿐 해당 상태가 비정상적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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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혹자 사람들은 대기업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제공하는 제품가격이 해외 수출가격에 비해서 높은 가격에 후려치면서 호구로 본다고 한다는 주장을 한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국가가 하나의 공동체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감안한다면 해당 가격차별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나는 취하고 있다. 기업이 해외에 제품 하나를 수출하면 해당 '부가가치'는 곧 지분비율에 따른 국내의 수익으로 이어지고 국내에 '자원이 유입됨'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실질적으로 이것은 국민들 다수에 대해서는 이득이며 국가적으로 본다면 중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이다. 국내가 아닌 해외시장에 대해서 얼마가 됐든 제품의 제조원가에 비한 부가가치를 발생시킬 수 있는 재화를 판매한다면 이득이라는 소리와 같다. 같은 이유에서 기업은 자국 내수시장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의 효용을 증대시키는 자원의 소비이기보다는 정책적으로 자원의 소비를 줄이고 해당 자원을 기업으로 집약시키는 방법으로 가격을 채택 및 판매하는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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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수의 경우에는 그 상황이 다르다. 명품 재화등과 같은 해외재화 소비는 국부의 유출을 가속화시킨다. 익히 들어 아는 명품브랜드 구X, 프라X, 애X 의 경우에는 제조가격에 비해서 그 부가가치의 비중이 매우 높은 브랜드 산업에 해당한다. 해당 제품을 하나 구매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자원'이 유출된다는 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혹자는 '명품'이 한국내 사회에서 사람들간의 관계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며 명품은 어느정도 필수재라는 주장을 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인정하는 부분은 있으나, 한국의 고객들이 명품시장에서 꽤 높은 수준의 고객층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몇몇 조사에서는 명품 기업 고객순위에서 1위와 2위를 왔다갔다한다고 하던데), 해당 재화의 소비가 국부를 갉아먹는 소비라는 점 역시 고려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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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떻게 보면 어떤 사람들은 매우 무책임하다. 개별 소비자가 없는 시장은 존재할 수 없고, 개별 구성원이 없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동조자가 없는 유행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임의의 혹은 추상적인 타자 혹은 권력자에 대해서 도덕적인 비난을 가하는 사람들은 타자에 대해서 자신이 그렇게 '용기있는 행동'을 통하여 자신이 그 타인에 비해서 좀 더 우월함을 즐기고 싶어 하는것만도 같은데, 사실 그 비난을 하는 자신 역시 그다지 비난의 대상이 되는 타자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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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집에 가려고 탔던 택시 운전사는 세월호 사건과 판교 환풍구 안전문제와 정부를 관련지어 비난하면서 국도에서 100km을 밟고, 안전 사고 문제를 지적하던 아는 아저씨는 빨리 가자며 6차선도로를 무단횡단했다. 아는 운동권 선생님은 집에 빨리 가기 위해서 총알택시를 애용한다. 문제의 원인이 단순히 권력자나 추상적인 집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천하지 않음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는 자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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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들이 말만 앞서지 말고, 직접 행동으로 해당 문제를 개선시기키 위한 노력을 해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 가운데 사람들의 '동참'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잘 짜여진 절차나 FM은 비록 처음에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체계화 된다면 안전성이 높다. 말만으로는 무엇을 못하랴, 나는 말만으로는 달도 따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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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난 무엇이 맞다고도 틀리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해당 상황에 대한 어떤 설명만이 있을 뿐이라고 보며, 그 설명들 중에 현상을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제안을 '채택'할 뿐이다. 물론 내가 말을 하기 위해서는 한정적으로 해당 글을 쓰는 상황에서 본 주장에 대해서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정당한 지적이나 반박이 제시된다면 해당 부분에 대해서는 수용할 여지가 충분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나는 이것을 정당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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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일 악독한 것 중에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순진무구한 사람'이다. 여러 매체들을 통해서 사람들은 '농촌주민의 때묻지 않은 인심과 푸근함'이라던지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협력을 해서 옹기종기 살아가는 모습' 등을 간접적으로 목격한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적'이라고 규정하는 경우는 종종 보인다.

하지만 매체를 통해서 전달되는 장면은 어떻게 보면 특수한 목적에 맞추어 장면을 조작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 그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주지 않는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그 말이 통하지 않는 '무식함'으로 무장한 사람들 다수의 광기는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는 쉽게 알지 못하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행동에 근거가 없는 그들은 야생과 같아서 겉에서 보면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고, 매우 이기적이며, 타인에 대한 질투와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상대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예우를 갖추어주면 정도 이상으로 ...무례하게 대하고, 상대가 조금이라도 있어보이면 그것을 어떻게든 기회를 보아서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수를 계산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순진무구한 사람들이다.

그런 순진함이라는 양의 탈을 쓴 늑대들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마녀사냥이 이루어져왔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늑대'들에게 잡아먹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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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싶어하는 것은 아마 많은 사람이 꿈꾸는 소망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사람들의 선호는 다양하고, 누군가가 좋아하는 것을 누군가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확실한 대상을 찾는것이 좀 더 안정적으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방법중에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 한 아이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단기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 행하는 '일회성 사랑'에 대한 모습이 어느정도 구체화된듯 하다. 현대 연인들은 서로에게 단기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제공한다. 그 연인 중 한명은 사랑을 갈구하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랑을 통하여 욕망을 쟁취하는 듯해 보였다. 그것은 마치 '감정을 소비한다'는 말이 적합하다 보였고, 그 사랑을 갈구하는 자는 일회성 소비로 인하여 만족을 모르는 일회성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만 같았다.

한명은 돈을 주고 그에 상응하여 한명은 그 상대방...을 다른 방식으로 충족시켜주고, 야밤 클럽에서 달콤한 말로 상대를 꼬드긴 남자와 그 말에 넘어가 감정을 충족시켜주길 바라는 여자 등과 같은 서로 다른 욕망이 서로를 지향하는 그런 관계, 서로의 욕구가 충족되거나 변동되면 언제든 그 한쪽을 과감하게 버리고 떠날 수 있는 그런 관계,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그런 모습은 마치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 그것을 버릴 수 있는 '소비적인 관계'가 아니었을지. 나는 이것을 '현대적 연애'라고 규정하고 싶다.

이것의 모습은 마치 마약과 같아서 감정의 충족을 원하나 언제든 다시금 불만족으로 회귀하게 되고, 그 불만족만 더욱 부각되어 마치 모든것을 빨아들이고 싶어하는 마약의 쾌락후 찾아오는 허무함과 같아서, 다시금 그 관계의 설레임을 즐기고 싶어하는 단기적 연애에 중독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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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수능날이 되면 그 감회가 어딘지 모르게 새롭다.

나는 특히 고기를 좋아했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시험을 잘 보기를 바랬었는지 수능 보기 몇일 전부터 주구장창 고기를 해 주셨다. 매일 매일 시중에 나온 사설 문제지 하나 하나를 시간을 재어가면서 풀었던 나는 첫 수능을 본다는 막연한 기대감과 더욱이 기대감에서 오는 불안감이 있었다.

수능 전날 집에는 지금은 별로 교류가 없지만 교감으로 근무하고 계셨던 외숙모가 보내주셨던 팥이 들은 찹쌀떡과, 아버지 친구분이 보내주셨던 페레로로쉐, 라파엘로, 란드누아 삼종 세트와, 가정의학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사촌누나가 보내준 건강보조제인 머리 맑아지는 물 여타 그 밖의 것들이 있었던 것 같다. 마루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잡다한 물건들은 나의 주변인들이 내가 보는 수능에 지대한 관심이라고 갖고 있는 마냥 집의 한 구석에 잔뜩 쌓여 있었다. 한창 공부하고 나와서 마루의 한 부분을 보면 그것들이 쌓여... 있는 모습에서 나는 '내가 수능을 본다.'는 사실을 재확인 했으며, 새삼 그것들이 하나의 부담으로 와 닿았던 것 같다.

첫 수능은 그랬었던 것 같았다. 긴장은 됐으나 나름 잘 준비되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내가 시험을 보는 것인지 보지 않는 것인지 사실 나로써는 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막연했었다. 예비소집일날 학교에서 수험표를 받아왔고 마지막으로 수학을 점검한 후 그 다음날을 준비하기 위해서 불을 끄고 따뜻한 전기장판 위에 이불을 덮고 누워 어두컴컴한 창문 밖의 하늘을 바라 보았었다. 조용히 이어폰을 귀에 끼우고 잠을 청했다.

수능날 아침, 새벽 5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시험장에서 조금 더 공부할 시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7번이고 봤던 책 세 권을 혹시 몰라서 가방에 넣었다. 어둠이 사라지고 파아랗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면서 '어떻게 되었든 잘 보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차만 어떻게 좀 태워주시면 된다고 말을 했었는데 어머니와 같이 시험장에 들어가는 떄까지 보겠다고 하시던 나의 아버지는 수험장까지 따라오셨고 기어코 내가 시험을 보러 들어가는 순간까지 같이 계셔주었다. 시험장 정문에서 알던 학교 선생님은 나의 손에 시험 잘 보라고 하시면서 따뜻한 캔 커피를 꽉 쥐어주셨고 어딘지 모를 부담감으로 시험을 보러 들어갔었다.

그 때 만큼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기대를 받은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일은 별로 없으며, 단순한 수능이라는 하나의 시험을 보기 위해서 집중되었던 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어찌보면 기묘한 하나의 원시 부족의 '의식'을 떠올리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 비유가 적절하지 않았지 싶다. 어린 아이가 성년식을 거치고 나오면 어른이 되어 나오듯, 수능이라는 단순한 시험은 마치 '성년의 의제'와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 성년의 의제가 아무리 단순한 것이라도 그 아이의 '성인화'를 상징하는 것임을 생각해본다면 굉장히 단순하지만 그 주변 사람들의 '막연한 기대'는 어찌보면 이해할만하기도 하다. 수능이라는 관문은 한국 사회에서의 하나의 의식행위와 같아, 나이에 비해서 치루는 늦은 성년식은 아니었을지.

그런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나는 그 '첫 수능'이 참 기억에 남는다. 매번 수능시험과 관련된 뉴스를 보면 당시의 기억을 새삼 떠올려 보는데, 분명 당시에는 힘들었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언제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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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취직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은 회사에서 어떻게 사람을 뽑을지 한번쯤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회사는 그 업무의 전문성이 여타 일반 중소기업 생산직의 단순한 조립라인처럼 낮지 않고 꽤 높다.

전문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회사에 들어갈 사람의 보유하고 있는 높은 전문성과 장기간의 수습기간이 필요하고 업무에 익숙해 질 수 있는 암묵지를 전달하는 사회화 과정 역시 필요하다. 회사는 바로 들어왔을 때 그 사람이 그 위치에서 자신의 직분을 유능하게 수행하기를 바라지 오랜 시간의 불확실한 훈련기간을 투자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회사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보면 매우 간명하다. 수습과정을 미리 거치는 것이 그 방법중에 하나이다. 현재 각 기업에서 시행되고 있는 인턴이라는 것이 그런 개념인데, 인턴은 분명 저임금이지만 인턴 과정을 거치면서 회사의 구조를 익히고 업무를 익힐 수 있고. 회사의 내부 상황에 대해...서 어느정도 얕게는 알 수 있다. 또한 인턴을 하는 도중 회사 내부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성실성을 어필한다던지 자신의 전문성을 어필한다고 그 부서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면야 후일에 입사 지원서를 넣었을 때 해당 사람이 회사에 필요한 사람인지 아니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인지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턴의 기간을 단순히 일을 착취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상대에게 어필을 하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또한 업무를 구체적으로 배우는 수습기간이라고 생각한다면야. 피고용자의 입장에서 회사의 입장을 고려했을 때 회사가 확실한 인재를 원한다면 순전히 인턴 과정을 '노동 착취'라고 말하기은 어려울 것임에 분명하다.

이게 흔히 기업에서 경력직 사원을 요구하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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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에 대한 비난일색으로 '무능함'을 지적하는 글을 보고 난 후 생각난 것은 부유하지 않은 가정에서 부모와 그 자녀의 싸움이었다.

부유한 집안이 아닌 보통 집안에서 청소년이 된 아이가 집단에서 주변 친구들이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부모에게 달라고 하면, 보통 그 아이의 부모는 능력이 안 되어 해 줄 수 없다고 답하는게 일상적인 모습이다.

좀 철이 든 아이라면 집안 형편을 고려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지만 아직 철이 덜 든 아이는 이런 상황에서, '왜 옆집은 그것을 갖는데 왜 나는 그것을 갖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따지는 방향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런 교착상태가 극에 달하면 아이는 '부모가 무능하다.'는 말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엄마(혹은 아빠)가 나한테 해준게 뭐야!'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한 마디를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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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부모 입장을 생각해보면 난감하다. 다음달 낼 공과금도 생각해야하고 식비도 생각해야하고, 관리비 적금도 생각하며 최대한 저축할 수 있는 부분은 저축하고 가족끼리 함께 즐길 수 있는 여유분을 마련하고, 자녀의 용돈이나 혹은 미래 자녀가 성장했을 경우에 대학에 입학할 가능성이 크니 대학 입학을 위해서 돈을 조금씩 모아두면 한달 재정이 빠듯하다.

그런데 아이가 갑자기 찾아와서 전혀 필요하지도 않는 것을 옆집 친구가 갖고 있다고 해서 자기도 갖고 싶다고 해서 조르러 온다. 얘한테 이걸 한번 사주면 다음번에 똑같이 조를때 뭐라 할말도 없고, 굳이 얘한테 이걸 사줘야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다. 물론 여윳돈이 많이 남고 정 아이가 갖고 싶다면야 사랑하는 아이인데 안 사줄일이야 있겠냐만은, 그렇지 않은 사정이기에 얘가 조르는 것을 거절했다.

이 아이가 그 다음에 하는 말이 가관이다. 가족의 장기적인 재무적 상황을 고려하기 위해서 아끼고 식비 의류비 학원비 용돈등과 같이 이미 정기적으로 아이에게 지출되고 있는 비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그것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한테 하는말이 '엄마(아빠)가 자기한테 해준게 뭐야!'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황스러울 것이다. 내가 저 나이될때까지 먹이고 키워놨는데 키워놓은 애가 고마운거 하나도 모르고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하면서 내가 해준건 전혀 생각 안하고 하는 말이 '당신이 나한테 해준게 뭐냐'와 같은 이상한 투정이라니. 아이한테 인정도 받지 못하는 재정지원을 지금 부모는 아이한테 하고 있는 것이며, 최소한 그런 부분에서 아이한테 해주고 싶은 최대한을 하고 있는 부모에게 기껏하는 말이 '엄마가 나한테 해준게 뭐야'라니.

가족의 경우라면 최소한 가족공동체로 묶인 집단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몇번 지속적인 싸움이 있어 묶여야는 있겠는데, 가족을 넘어서서 국가라는 공동체라면 어떨까?, 국가 정치인들에 대해서 '이런 투정'을 반복적으로 부린다면 어떨까? 국가 정치인들이 과연 국가의 안정적인 체제유지를 위해서 노력할까 아니면 순간의 국민들의 만족을 위해 장기는 생각 안하고 단기의 인기영합적인 말만 주구장창 뽑아낼까?

이것은 신뢰와 이해의 문제이다. 아이가 최소한 정상범주에 있다고 여겨지는 부모의 행동에 대해서 선의의 추정과 신뢰 그리고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했더라면 아이는 '엄마가 나한테 해준게 뭐야'같은 정말 말도 안되는 말을 하지 않았을수도 있고, 부모를 오히려 이해한다는 듯한 발언을 했더라면 오히려 부모는 아이가 자신을 믿어준다는 신뢰감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일하고 굳이 분쟁까지 가지 않고도 아이가 원하는것을 들어줄 수 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부모는 아이를 끝까지 도우려 할 것이고, 아이는 그런 부모의 지원아래 앞으로 더 긍정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런 신뢰와 선의추정 이해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배척하고, 불신과 맹목적인 혐오 그리고 무능이라는 말을 쏟아내면서 나에게 최소한 악의가 아닌 사람에게 무조건 공격적인 말만을 내뱉는다. 조롱과 풍자를 일삼는다. 이것은 과연 성숙한 행동인가?

성장이 있기 위해서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 태어날 때 어떤것도 갖고 태어나지 못했으며, 죽은 후에도 어떤것도 갖고 죽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자명한 것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희생해야한다는 점이다. 이 가장 자명한 것을 배척한 상태에서, 끊임없는 성취만을 말하는 것은 어찌보면 그 사람이 천국에서나 있을법한 이야기를 여기서 하는게 아닌가? 할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Posted by 종합유추

1. 플라톤의 국가 1권에서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도 올바름에 대해서 개념적으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발언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름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방의 개념정의를 빌어 한계를 지적할 뿐 실제로 자기 스스로 올바름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하는 모습은 나타나 있지 않다. 이 부분은 추상개념중에 극도로 추상적인 개념들 사이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소크라테스가 상대방의 논리에 대해서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올바름의 정의를 지적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 올바름에 대한 한계적 정의의 논리적 요건을 따져보면서 논리적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에는 맥락을 보지 않은 근시안적 견해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의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서 상대방과 자신이 동의하는 개념적 기준에 빌어 설명한 것이라면 그 맥락으로 해석해야 맞는 것이지 그 부분을 지적하기에는 그것은 오독으로 보인다.

2. 현대인들이 당위적으로 생...각한다는 명제는 자신이 당위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에서 나온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자신은 남들과 다른다는 오만함.(물론 다르기야 할 것이다. 같은 심적상태에서 말화된 이야기인지 검증할 방법도 없고 불일치도 자주 목격되니까.)
근데 그 사람이 말하는 현대인은 아무래도 오늘날 사람들 중에 당위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한정해서 기술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태어나서 한번도 도덕과 자신의 행위사이에 갈등을 겪어본적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더 나아가서 그런 사람들은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당연히 그것을 해야할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을 위한 합리화과정을 단 한번도 겪어 본적이 없는가?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고 자신을 친구로 규정하기 위해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얼마나 많은 설득을 하고 주변 사람에게 자신의 입장에 동조해 달라고 하기 위해 설득하는가? 그것이 정녕 도덕 원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도덕인가? 난 이해 못하겠다.

그런 가운데서 현대인은 이분법적이고 당위적이며 고대인들은 논증적이었다고? 세상에 16세기 철학책만 모아놓고 '와! 이 친구들은 당위적이 아니라 편집증적으로 모든 것에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었구나!'라고 말하는 바보같은 짓은 뭔 이상한 생각인지 감이 안 온다. 차라리 자부심에 가득차서 자신들은 논리적이고 자신이 아닌 사람들의 집합은 비논리적이라고 말을 하던가?

3. 추상개념을 사용할거면 처음에 합의를 해야한다. 합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추상개념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게만드는 요인이 되며 그것은 서로 입장 차이 때문에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아니면 처음에 설명을 해주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름 당위 훌륭함에 대해서 그것을 단순한 감정을 표현하기 이상의 개념적인 용어로 사용하는 순간 그것은 그나마 한정적으로 가능한 소통마저 불가능하게 만든다.

4. 그리스 시대의 사람들의 문화적 시대상을 읽어가면서 그 사람들의 사고를 추정하자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대해서 나는 코읏음치는데. 그 사람이 직접 자신에 대해서 기술한 자서전을 읽고 그 사람의 심적 상태에 대해서도 추정하는 과정에 오류가 생기는데 세상에 시대적 배경에서 개인의 사고과정을 끄집어낸다니 그리고 어떠한 논증도 없이 '그리스인들이 매일 전쟁에 빠져있었을 테니 그 사람들이 전쟁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했을것이다?' 하느님 세상에 맙소사, 그럼 있는 나는 한국에 살고 있으니 김치이야기만 해야겠네? 도대체 무슨 망발인지 이해가 안 간다. 텍스트에 치중할거면 텍스트에 치중을 하고 문학적 비평을 할거면 최소한 충분한 근거있는 주장을 하던가? 망할 그게 어떻게 훌륭하고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지 난 더욱이 이해 못하겠다.

Posted by 종합유추

어떻게 보면 내가 가진 '분노'는 발전의 원동력일지 모른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가 지향하는 바에 대한 치명적인 모욕감을 느낄만한 자극을 받게 될 경우, 일반적으로 난 내가 지향하는 바를 더욱 포괄적으로 해석했을 때 상대방의 주장 역시 내 주장내에서 설득가능하다거나, 혹은 상대의 논리를 전적으로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내 논리내에서 설득가능한 더욱 세련되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을 주로하는데, 사실 이런것을 하게되는 원인은 대체적으로 문제를 느낀 상태에서 발생하는 모욕감이 이끄는 충동 때문인 경우가 많다.

예를들어 타인의 주장의 납득하지 못할 사실이나 혹은 엄격하지 못하다는 부분에 대해서 나는 극도의 강박에 가까운 분노를 표출하고 그것의 개선을 상대에게 요청하는데, 상대에게 그것이 수용되지 못하고 상대가 그것을 무례하게 반응할 때 나는 종종 굉장한 분노를 느끼고, 그 분노에서 모욕감을 느낀다. 이 모욕감은 상대에 대한 굉장하고도 강한 증오와 더 나아가서 상대방에 대한 복수의 심적상태를 야기하는데, 그 복수의 심적상태는 대개 '상대의 주장이 어떠한 이유에서 말이 안 되며 왜 내 방식을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이어진다. 결국 이런 과정에서 발생하는것은 정신질환과 스트레스 그리고 상대의 논리에 덧 붙여져 '왜 상대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는가?'하는 것에 대한 나름 생각한 치밀한 반박이다.

어떤 발전이 있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뤄야 하는것처럼, 발전된 논의를 하기 위해서 스트레스를 누적하여 생명을 갉아먹어야만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나름 분노를 가지는것도 좋지 않겠나 싶다. 나름 짧고 굵은 멋진 삶 아닐지, 죽음을 향해 달리는 급행열차에 탄 기분은 얼마나 신선한가?

 사실 태어나자마자 죽는것이 정말 제일 행복할지도 모른다. 나비효과 감독판 엔딩의 결말이 그것이지 않던가, 끊임없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한계 때문에 고민해야하는 상황에서 미래에 올 어떤 것에 대해서 결정론적 앎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면 혹은 시간의 흐름(글쎄 변수라하기에는 시간을 아직 제대로 정의하지 못했다.)에 따라서 그 오차범위 역시 가늠하기 어렵다면, 그와 같이 태어나자마자 혹은 태어나기전에 죽는 것이 고통없는 최선일지도.

Posted by 종합유추

11세기 프랑스 한 시골 마을 소란한 장터 한가운데 누더기 옷을 입은 사내가 등장했다. 신의 은총을 비는 아낙과 농부들이 사내 주위를 감싸는 가운데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사의 음성을 전하노라, 성지를 되찾아라.” 십자군 전쟁의 서막을 연 은자 피에르 신부였다.

처음 피에르는 가는 곳마다 반미치광이로 취급됐다. 고위 신부들과 귀족들은 피에르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갑자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예루살렘을 공격하라니. 우연한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피에르는 결코 역사 속에 기억되지 않았으리라. 때마침 날아온 비잔틴 황제로부터의 구원 요청과 이를 이용하려했던 로마 교황이 ‘성전’을 촉구한 순간 은자 피에르는 선각자로 추앙받았다.

피에르가 선동한 이른바 ‘민중십자군’은 십자군 전쟁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동시에 종교적 광기와 아집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피에르가 주장한 ‘신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농부, 직공, 군인들이 재산을... 팔아 그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나아갔다. 신념은 충만했지만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냉혹한 현실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단지 막연히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시작한 행군은 굶주림과 죽음을 불렀다. 신을 따른다던 그들이 곳곳에 자행한 일은 약탈과 살인 등 범죄 행위였다.

민중십자군의 가장 큰 문제는 주동자 피에르 신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종교적 신념이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사람들을 모으고 선동했던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신부로서의 역할에 머무를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군사와 정치 지도자로서 안쓰러울 정도로 무지했다. 그는 수도원 안에서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평안을 주는 사람이었는지는 모른다. 수도원 바깥에서 그가 사람들에게 남긴 유산은 광기와 상처뿐이었다. 민중십자군은 성지에는 가보지도 못한 채 어이없이 전멸하고 말았다.

10세기 가까이 지난 상황에서 나는 이것과 유사한 상황을 본다. 이해할 수 없지만, 어찌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저 그들이 원하던 혹은 원하지 않던 어떤 결말에 도달할지를 기대할 뿐이다.

 

Posted by 종합유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