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망 후 염습 및 입관, 발인 후 화장장에서 화장까지 끝나고 유골함을 매장하고 돌아왔습니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장례식에서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하고 지금은 수익-비용 계산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와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냅니다.
2. 누군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슬프기 보다는 한번도 슬픈 기색을 보인적 없던 사람이 눈시울을 붉히며 입술을 부르르 떠는 것이 더욱 안쓰러웠습니다. 절차에서 몇 번이고 슬픔이라는 것이 없었던 사람의 얼굴에 슬픔이 자리 잡았습니다. 슬픔을 보이기 싫어 얼굴을 이리저리 비틀어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어색하기도 하덥니다. 항상 사람이 강할수는 없나 봅니다. 그분의 얼굴을 보면서 친구의 죽음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슬픔'이라고 하기 보다는 고통이라는 감각에 가까웠던것만 같습니다.
단순히 대상에 대한 '상실감'이라고 그 고통을 표현하기에는 그것은 이해하기 전에 너무 직관적으로 다가오며 더욱 격정적입니다.... 단순히 형용이 없는 상실감으로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어색합니다. 그것은 격정적인 상실감이라고 부르는게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장장에서 들리는 다른 사자(死者)의 가족들이 울부짖는 외침등과 같은 것은 기존의 울음과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외치는 전신으로 외치는듯한 메어지는 듯한 울음소리는 마치 날카로운 화살촉과 같아 듣는 사람들의 고막을 통해 정신을 찢어발기고 짓이깁니다. 아마 그런 울부짖음을 들은 사람들은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고통에 의해 유발된 행동에 의해 고통을 강요당하는 상태에 놓입니다. 하지만 이는 가장 직접적인 표현방법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동물적인것 같으며, 그렇기에 곡소리는 그 나름의 표현이 목적으로 하는 전달의 효율성에서 미학적인 듯 싶습니다.
3. 어렸을 때 죽은자를 위한 굿을 소재로 다룬 예술작품을 본적이 있습니다. 2시간 30분 가량 테이프에는 계속 웅얼웅얼 거리는 나이든 노인네들의 굿에서의 소리가 들립니다. 아마 그 작품이 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그걸 본 저는 그것이 재미 없다는 사실을 생각했던 것만도 같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천주교이신지라 미사를 드리는데, 그 미사를 드리러 오는 분들 중에는 젊은 사람들이 없었고, 대게 70 주위의 노인들이 그 미사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족들이 가운데 있고, 그 주위를 노인들이 둘러싸고 미사를 드리는 것을 들었을 때, 저는 그 미사에서 과거 그 굿에서와 같은 노인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이미 살아온 날이 훨씬 많은 나이든 노인네들의, 그 산송장들의 목소리는 생동감이 없습니다. 낮고 생동감 없고 균일한 그 목소리들은 마치 죽은자를 위해 부르는 죽은자들의 노래와 같습니다. 얼마안가 죽음을 준비해야 하며, 다가올 죽음이 두렵고, 죽음을 맞이할 자신이 없고 두려운 자들이 한결같이 부르는 죽음의 노래는,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절대자를 노래하는 시체들의 노래와 같습니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노래, 아마 그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죽음에 대면하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시청각적인 표현과도 같은 것 같습니다. 그들의 말에는 확신이 없습니다. 말만을 들어보면 그들은 죽음을 극복한 것 같으나, 죽음에 대해서 극복했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절대자에 대한 확신이라고는 목소리에서 찾기 힘듭니다. 그저 그들은 절대자가 있기를 바라며, 믿지만 믿지 못하는 자들의 목소리와 같아 죽어있습니다.
장례미사에 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나이든 노인인 이유는 아마 나이든 노인들이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죽은자들을 위해 노래하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위한 방법으로 미사곡을 부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그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며, 죽음을 어느 순간에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이미 죽어 있지만 곧 죽을 사람들로써 죽음을 위한 구원의 노래를 부릅니다. 아마 그들은 노래를 부르는 행동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구원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4. 상대방에 대한 익살은 상대방의 상황을 보아, 그 농이 그다지 치명적으로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임을 고려해가면서 해야합니다. 그렇기에 대체적으로 좋은 익살은 자기비하이며 단순한 방식으로 행해집니다. 하지만 농이 정황상 상대방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올 때, 그것은 농이기보다는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 가까운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계속 농을 상대방에게 던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농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꺼림직합니다. 그런 사람은 익살을 사용한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을 도발하는 것과 같아. 그다지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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