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나는 인류학 교수님에게 어디서 교양정도로 주워들은 자연과학적 결론들을 바탕으로 특정한 결론을 말한 바 있다. 지금 생각하면 해당 주장은 너무나도 엄격하게 검증이 되어 있지 않아, 다시 교수님에게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말하기 조차 부끄러울 정도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에 나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굳게 믿었었으며 해당 사실이 굉장히 '많은 증명'을 바탕에 두고 있는, 서로 엄격하게 따지자면 매우 다른 전제들을 연역하여 도출된 결론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서로 관련이 없는 개념들을 순전히 논리를 사용하여 얽고 섥어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괴물'을 만들어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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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수님이 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많이 좌절을 했으며, 내 주장은 틀릴리가 없다는 것을 어느정도 확신했었던 것만도 같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경험 중에 부모님과의 경험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 '자신의 부모님이 세상의 최고인지 안다.'는 것과 유사한데,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곧 전부이며 내가 알고 있는것만이 맞다고 생각했으며 내가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용인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상대방을 경멸했으며, 조롱했고, 그 사람은 거대한 것을 보지 못하며 매우 협소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그것을 나의 주장에 맞게 각색하여 주변 사람에게 말하고, 그것에 동의를 구하여 사실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맞다는 '허무한 눈가림'을 통해 자신의 지적 만족감을 충족시켰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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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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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주장은 사회과학적 주장의 말하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당신의 주장은 사람들 가운데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 머리속의 개념들 가운데 이야기고, 당신의 주장이 당신에게 만족감을 줄지는 몰라도, 당신이 직접 보고 겪은 것이 아니라 남이 보고 느낀것을 당신이 재구성하여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과 높은 수준의 괴리가 있을겁니다. 같은 이유에서 저는 당신의 과제는 실제 발생하는 것을 기술하는게 아니라 당신의 머리에서 뛰어노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당신의 과제에는 좋은 평가를 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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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들었던 느낌은 아마 내가 굳게 믿고 있었던 신이 부정당하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비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내가 고심하여 만들어낸, 내가 사실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 부정당하는 것은 곧 그것을 유도해낸 나의 사유능력, 또는 그 사유능력의 기반인 나의 존재에 대한 부정과 같이 와 닿았으며 그것은 마치 나 자신을 모독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그것을 부정해야만 했다. 나의 생각이 부정당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으며, 어릴적 나 자신이 세계라는 격한 파도가 몰아치는 거대한 바다위에서 어떻게든 몸이 쓸려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잡은 조잡한 배의 흔적인 나무판자, 혹은 지금의 위치를 알기 위한 작디 작은 부표 하나를, 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것조차 놓치게 되어 버렸을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낀것인지 몰라도 나는 그것을 부정했었어야만 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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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아마 당시 내가 그 작디작은 것을 놓아버렸더라면, 옹졸한 자존심을 버리고 교수님의 말씀을 한번 조심히 생각해보며, 왜 교수님이 그런말을 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더라면, 내가 거칠다고 생각했던 불확실한 세계라는 파도 자체에 떠밀려가는 것이 불안하고 위험한 것이라는 생각을 더욱 일찍 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저 단순한 문장 하나에서 내가 나의 생각은 정당하지 않고 항시 만족감을 줄 뿐이라는 것을, 한계적으로 합리적일 수 있으나 항시 그것은 재검증을 필요로 하며 현실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결코 현실의 경험과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금보다 좀 더 빨리 느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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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체계는 매우 조잡하며, 그 완전하다고 착각했던 나의 체계가 조잡하다는 것을 확인하여야만 했으며, 조잡함에 엄밀함을 도입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처음부터 하나 하나 다시 시작해야하며, 그것은 엄격하게 체계화 되고 비록 불확실하고 불확실함 자체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하든 격한 파도를 내가 온전한 파도로 만들 수 없지만 그 가운데 격한 파도 자체를 받아들이고 나 자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아마 좀 더 빨리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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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방식으로 하나 하나 쌓아 지금에 도달했다. 교수님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분노는 지금에 와서는 하나의 고마움으로 느껴진다. 내가 그 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면전에서 비꼬고 조롱하는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항시 온화한 모습으로 비록 말이기에 그 의미가 온전하게 전달되지는 못하나, 그것을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어떻게든 설명하기 위해서 배려를 하려고 했던 그 모습을 떠올려보면, 그것은 어찌 보면 진정으로 아는자가 알지 못하는 자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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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교수님께 자주 들었던 그리고 내가 자주 사용하는 말중에는 pathei mathos라는 말이 있다. '신은 인간을 고통을 통해서 배우게 한다.'는 말과 같다. 직접 경험하거나 혹은 곰곰히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결코 배움의 단계에 도달할 수 없다. 문제에 직면한 인간이 사실을 고통스럽게 체험하며 그 가운데 배움을 얻는 것과 같이, 스스로의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되지 않은 진정한 배움이 될 수 없다고 나는 그것을 해석한다.
최근에 좋지 않은 경험을 겪었고, 개인적으로 기분 나쁜 경험이긴 했다. 다만 내가 과거에 그와 비슷한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그 가운데의 교수님의 배려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나 또한 스스로에게만 행하는 위안일지도 모르나, 그의 선택을 존중할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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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가 나에게 와 '아저씨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해요, 아저씨가 말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하는건 틀렸어요!, 아저씨는 바보래요!' 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허허 그래? 뭐 그럴수도 있지, 하지만 좀 더 주의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관용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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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직접 그 인류학 교수님에게 죄송하다 말을 드릴 수는 없으나, 이 글을 빌어 교수님께 다시금 죄송하다는 말을, 그리고 늦게나마 교수님의 말의 뜻을 어느정도 이해한것만 같다는 말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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