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계량화되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박제로 전락해버린다.

경제학에서의 수요 공급 곡선. 효용함수 그래프. 시장 시장실패 정부실패를 비롯한 라이파이레스 파셰 사무엘슨 내쉬 그 익숙한 이름들에 이르기 까지.

계량화 되어 메뉴얼화 된 기호들에는 영혼이 없다. 마치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세계를 수식이라는 틀 안에 박제해 놓은 하나의 그림과 같아서. 역동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며 평면적인 세계만이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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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평면들을 하나 둘 쌓아 입체를 만들고 세계를 분석하기 위한 틀을 만들며, 불확실성에 확실성을 도입한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학문이다.

지금 보고 있는 것들. 수치화 된 자료와 모델들은 마치 mri를 통해 찍어낸 단면들을 겹쳐서 입체적인 대상을 모사하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들은 살아있는 것을 모방하지만 결코 살아있지 않다.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생동감을 상실한 현실의 피조물은 자신이 마치 현실인마냥 스스로를 뽐내지만, 결코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없는 가상과 같다.

말을 그려낸 뛰어난 그림에서 역동성과 생동감을 느낀다고 하나. 그것이 과연 대상의 역동성과 생동감이겠는가? 생동감과 역동성이 그것에 박제된 것은 아니던가?

차갑고 곧게 뻗은 곡선들의 거미줄에서 사람들은 현실을 논하고. 뜬구름 잡는 실체가 있는지도 모르는 시장과 정부에서 사람들은 대상을 논하는 것은 죽은 경제학자들의 묘지 앞에서 지내는 제사와 같다.

갖고있는 3판 맨큐의 경제학책을 간혹 펼때마다 나는 마치 오래된 박물관에 들어온것만 같다. 미국의 거대한 자연사 박물관에 들어가 화석과 대상을 재현한 모형을 보며 묘한 흥분을 느끼며 대상을 극찬하지만, 결국 그것들도 죽어있다는 것을, 그것들은 모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다보면.

가을 바람이 참 쌀쌀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생각한다.

 

Posted by 종합유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