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2018. 12. 10. 23:59

이야기를 만들어 전달하는 것은 역사적인 행위다. 문자를 기록하여 저장하기에 파피루스나 종이와 같은 기록매체의 희소성이 너무나도 높았던 먼 옛날, 사람들이 고안했던 것은 이야기였다. 친숙하기로는 전래동화에서 호메로스 서사시의 일리아스나 플라톤의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은 구전되는 이야기였다. 전래동화는 외우고 다시 이야기하기 위해서 굉장히 단순한 서사구조를 갖고 있으며 선악, 보상과 처벌과 같이 자극인 것이 특징이고, 이와는 차이가 좀 있으나 그 두꺼운 고대 그리스 저작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노래하소서 여신들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플라톤은 플라톤의 경험을 서술하는데에서 시작한다. 암송하기 쉽게 하기 위한 이야기구조이다.


이야기의 형식에 따른 규모를 이야기의 경제성이라고 지칭하기로 하자. 고대의 이야기는 전달되기 쉽도록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 다른 내용들은 최대한 배제내는 방식을 이용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호랑이가 계략을 써서 오누이를 잡아먹으려 한다는 사실만 알면 되지, 호랑이의 가정사가 어떻고, 호랑이의 식성이 어떻고 호랑이가 오누이를 진짜 잡아먹으려 했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에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이야기 구조에서 배제된다. 이는 일리아스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리아스는 서사방식을 음보 단위로 설정하여 암송하기 쉽게 만들었고, 플라톤의 국가는 다른 성격에 대한 기술 없이 흘러가는 대화(“담화”)만을 내용으로 담았다. 이는 서사의 장르에 따라 이야기의 최대 분량을 제한한다. 대화는 한 회의 담화를 담으며, 서사시는 장단위로 사건을 담고, 전래동화는 전반적인 갈등구조를 담는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의 경제성은 동시에 이야기의 완결성과 연결된다. 이야기를 제작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만들 것인가는 독자를 위해 제한된 분량, 혹은 암송하기에 적절한 분량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야기를 제작하는 사람은 어떤 등장인물을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할 것인지, 혹은 어떤 사건을 중심으로 다룰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만일 이 선택에 실패하게 되면, 이야기 가운데 서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은 암송자에게 어려움으로 독자에게나 의문으로 작용하고, 이는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를 떨어뜨리게 된다.


정리하자면, 이야기의 경제성은 제약조건(Constraint)로 완결성은 퀄리티(Quality)로 요약된다. 인간의 뇌의 암기력을 크게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 제약조건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기록매체의 발달에 따라 점차 확장된다.  기록매체에 대한 제약이 약해질수록 동시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은 더 많아지고 이야기의 복잡성 역시 높아진다.


퀄리티는 무차별한 제약조건 아래서 서사의 복잡도로 나타나며, 엄격하게 분량이 제약된 경우 혹은 제약조건이 크게 의미를 갖지 않는 시대(ex 현대)에서 의미를 갖는다. 퀄리티 발전 단계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3대 비극 작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3대 비극작가는 시대순으로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로 이어진다.


아이스퀼로스의 대표작 아가멤논[1]은 트로이 전쟁을 끝마치고 돌아온 아가멤논이 클뤼타임네스트라에 의하여 궁전 안에서 살해당하는 순간까지를 하나의 이야기로 잡는다. 이야기는 당시 관객들의 공통된 배경지식인 신화에 의존하며, 이야기 안에서는 진행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인물 성격에 대한 입체적인 기술은 나타나지 않는다.


소포클레스의 대표작 안티고네[2]는 자신의 죽은 형제의 시신을 묻으려고 하는 안티고네와 묻으려고 하는 시신이 폴리스를 배신한 반역자의 시신이기에 묻기를 방해하는 크레온 간의 대립을 그려낸다. 극에서 크레온과 안티고네는 각각 인간의 법도와 자연의 법도를 상징하며, 소포클레스는 각자의 성격을 추상적 질서의 충실한 대리인으로 드러내는 극작을 시도한다.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작 엘렉트라[3]는 아가멤논의 서사를 뒤틀어, 아가멤논과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자제인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에우리피데스의 그것은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퀼로스의 그것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데, 엘렉트라는 가계의 자산을 상속받아 좋은 혼처를 구하기 위해 오레스테스를 이용하여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살해하려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주로 이루며, 정당화 되지 않은 명분들을 통해 인간 군상을 형성하는 구도이다


위의 설명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아이스퀼로스에서 에우리피데스의 극작으로 이어질수록(시간 경과에 따라) 이야기의 복잡도가 상승한다. 이것은 퀄리티 변화의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다. 아이스퀼로스의 극작에서 단순히 줄거리를 연출하는 수준에 그쳤다면, 에우리피데스는 선택해야할 주인공의 성격과 그 복잡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다.


이런 작품은 고대 그리스 문명이 침체한 후 북아프리카에서 그리스 문명이 다시금 유럽으로 유입되는 시기인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며 재해석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나 비극작품들은 번역되어 르네상스 이후의 극작방법에 다시금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게르만 민족의 영웅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노래나 베어울프의 신화는 이에 녹아들며,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영국의 셰익스피어 문학의 입체적 서사[4]직접적영향을 미친다.



[1] 천병희. (2008).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2] 천병희. (2008).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3] 천병희. (2008).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4] 강석주. (2006). 서구비극 담론의 보수성과 셰익스피어. Shakespeare Review, 42(3), 367-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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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종합유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