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2018. 12. 12. 22:31


Antichrist에 관한 해석들을 보면 해석들은 크게 세 가지 주장을 한다.

1)     영화의 제목인 Antichrist, 신에 대한 작중 설명을 보면 트리에가 사용한 Antichrist에 대한 개념은 니체의 Antichrist로부터 나왔다.

2)     Antichrist는 실은 여성혐오적인 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성혐오를 가장하여 여성혐오를 풍자하거나 혹은 비판 하는 것이다.

3)     Antichrist안드레이 타르콥스키에게 영화를 바친다.”는 것은 안트레이 타르콥스키에 대한 조롱이다.

 

첫 주장의 대표적인 예시는 박대민 기자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대민 기자의 영화평론에서 박대민 기자는[1]영화 속에는 `신은 죽었다`는 니체에 대한 인용이 가득할 뿐 아니라 제목마저 니체 동명 저서에서 따온 것인데, 이를 `가장 기독교적인` 감독에 바친다고 했으니”, “이는 불교를 거론하면서 죄가 아닌 고통이 문제이며 이를 벗어나려면 "선악을 넘어서야 한다"는 니체를 연상시킨다.”, “여자는 남자 다리에 못을 박고 무거운 원형의 돌을 달아놓는다. 끔찍한 장면이라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지만 감독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나 `영원회귀` 운명을 짊어진 니체의 초인을 남자를 통해 보여준다.”, “영화는 니체가 주장한 가치 전복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니체는 예수를 칭송하기도 했다.” 같은 진술을 한다.

이 진술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니체가 쓴 도덕의 계보선과 악을 넘어서혹은 안티크리스트는 플라톤의 질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서적이 분명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계보는 이후 보에티우스나 안셀무스, 토마스아퀴나스의 교부철학에 영향을 미치고, 종교의 교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부동의 진자나 분류학, 플라톤의 국가에서 제시되는 이데아에 대한 3개의 비유 개념을 통해서 구체화 된다. 이는 교부철학의 신플라톤주의라는 분파로 드러난다. 니체의 사상은 이후 질 들뢰즈가 인용을 하며 아리스토텔레스와 들뢰즈의 가치체계의 재구성 담론에서 드러난다.

이 점에서 니체가 아퀴나스의 유명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플라톤의 체계를 비판한다는 관점에서 니체의 영원회귀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MW의 대립구도에서 플라톤에 가까운 것은 M이다. 플라톤은 합리성(reasonable) 혹은 탁월함을 믿었고, 합리성을 기반으로 철인정치를 시도하였다. 합리성을 가진 철학자는 좋음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이를 위한 몇차례 시험도 한 인물이다. M이 사실을 접하는 것은 플라톤의 관점에 가깝다. 특히 니체의 위버멘쉬라는 개념은 Antichrist가 아니라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제시된다. 해당 저작에서 산에서 내려온 광인과 대화하는 가운데,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서는 굴종하는 낙타 -> 반항하는 사자 -> 어린아이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논의의 기반은 군축도덕과 노예도덕에 있고, 가치의 순응하는 자가 아니라 가치를 생성하는 자로 나아가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위버멘쉬의 비유에서 M은 기존의 질서를 버리고 더 나은 가치체계로 나아갔는가? 삶의 주체가 되었는가? W를 살해할 때 M은 결국 W와 같은 두려움의 감정을 느꼈을 뿐이다. 설령 그것이 새로운 가치체계로의 한 걸음이라고 이야기 하더라도 이는 W가 영화 초반의 현기증’, ‘갈증’, ‘소음 현상’, ‘손 떨림’, ‘거친 호흡’, ‘빠른 맥박’, ‘매스꺼움등을 느꼈던 것을 설명할 수 없다. M은 가치체계를 전복한 것이 아니라 추종한 것에 가깝다.

따라서 박대민 기자의 논리는 설명력을 갖지 못한다.

 

두번째 주장의 대표적인 예시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안티크라이스트생각”(2011)[2]이 있다.

 

이동진의 해석이 너무 길어 옮기지 않고 해석의 한계를 제안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다.

a)     이동진은 영화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종교적 해석을 너무 많이 사용한다. 닉을 니콜라스로 치환하여 인간의 승리로 비유하는 부분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트리에가 종교적 메타포를 사용하는데 그만큼 익숙하냐는 것인데, 이전 작품들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을만한 근거는 없다.

b)    후반부에 W가 아이의 죽음을 목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 만한 근거는 없다. 이를 죄책감이 빚어낸 기억 속 왜곡으로 성급하게 간주해버린다.

c)     쾌락과 죽음간의 관계를 근친관계에 있다고 보는 2번쨰 부분에서, M의 성기를 나무로 짓이기는 것과 음핵을 절제하는 것 간에는 상당한 시차가 있다. 이를 죽음의 쾌락을 거세한다고 나아가는 것은 비약이다.

d)    남자가 여성을 살해한 것이 가장 큰 폭력으로 간주하면서, 또 하나의 마녀사냥을 끝냄으로서 질서 있는 세계로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고 하였으나, 이는 세마리의 거지들을 배제한 해석이다. 영화에서는 세마리의 거지들이 도착했을 때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WMW 둘 중에 누군가는 죽어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며, 특히 까마귀를 통해 살해의 기회를 얻은 남자의 관점에서는 이걸 마녀사냥이라고 하기에는 설명에 비약이 있다.

e)      마지막에 M이 목발을 집고 내려가는 길에 있는 것은 살해당한 여성의 시체가 아니라, 남성의 시체다. 심지어 야외에서 W가 가학을 요구하는 나무에서 클로즈 인 클로즈 아웃 될 때 보였던 것은 성별을 알 수 있는 사람의 시체가 아니라 그저 손일 뿐이었다 여자의 희생의 결과는 발견하기 어렵다.

 

이외에도 많으나 문제될 것이 너무 많아 더 이상 적지 않는다.

 

(1)   Antichrist

본 감상에서는 조금 더 내러티브들의 구성요소나 연출기법이 갖는 피상적 의미에 집중하고, 이동진이 접근했던 것과 같은 종교적 상징을 통한 접근은 최소화 하는 것으로 하겠다.

 

a)     배경 조작

Antichrist에서는 의도적으로 텍스쳐를 조작하는 쇼트들을 많이 넣는다. 이 텍스쳐 조작은 이후 장의 변화와 긴밀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오버랩과 합쳐지면서 등장인물인 W의 심리적 상태를 나타내는 요소로 기능을 한다.

 

초반에는 W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혼란이 텍스쳐의 일그러짐과 흔들림을 통해 드러난다. MW와 함께 에덴에 진입하기 시작하는 시점인 34분을 기점으로 하여 화면이 몇차례 일그러진다. Chapter 1의 다음 장면들이 그 예시다

34(일그러짐)

39(일그러짐)

40(카메라 흔들림)

49(일그러짐)

49분 직후 울음이 들리는 숲과 여자의 머리가 오버랩되기 시작한다.

50 09

 

W가 좋은 자식을 얻기 위해 떡갈나무가 도토리를 떨어뜨린다는 말을 하고 이를 이해했다고 말한 후. M이 부검사실을 발견 한 뒤 그 사실을 이해했다고 말하고 나서부터는 갑작스럽게 가 오기 시작한다. (추락 하강)

56(도토리 떨어짐)

1 1
(
비가 오기 시작)

11
(
비 가운데 다락방 발견)

14(비와 함께 나무 쓰러짐)

 

MW가 닉의 신발을 거꾸로 신겼다는 것을 W에게 추궁. W는 이를 부인하나, 명백한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W의 두려움에 자기 자신을 적음. W는 들켰다고 생각하고 M을 구속하기 시작함, WM에 대해 광기를 드러내기 시작, 그 혼란스러운 상황을 안개로 드러낸다.

112(W에게 추궁)

1 20(M의 탈출과 안개)

126 34(광기서린 W)

 

 안개가 걷히는 것은 일시적으로 W의 정신상태가 온전하게 돌아오나, 1시간 35분에 W의 괴성과 함께 우박이 내리기 시작한다. 1시간 39분에 최종적으로 W를 살해하고 평온한 상태로 돌아오게 된다.

 

129
(
일시적으로 정신이 돌아옴)

1 35(우박이 내리기 시작)

139
(W
를 살해 후 돌아온 평온)

 

시간

34~ 49

56 ~ 14

112~ 126

129~ 139

해당하는 장

Grief

Pain

Despair

세 거지들

효과

필름이 왜곡됨

비가 옴

안개가 낌

우박이 내림

 

 

b)    타르코프스키 (1시간 43)

 

 

 영화가 끝나고, 트리에는 이 영화를 타르코프스키에게 헌사한다는 말을 남긴다.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순교일기에서, 인류가 영적결핍이라고 하는 무서운 병에 걸려 있고 이것이 스스로를 파괴시킨다고 말한다. 타르코프스키는 영화를 통하여 인간을 치유하고자 한다. 서사에서 자연물인 물, , 안개, 바람 등은 신적인 것이며 구원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특히 물과 불의 대립은 더욱이 그러하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향수』와 『희생』을 보자.

 향수에서는 양초를 온천장의 한쪽 벽에서 다른 쪽 벽으로 옮기는 롱테이크 씬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미신적인 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양초는 불이며, 양초를 옮기는 공간은 온천장으로 수분을 가득히 머금고 있다. 불과 물은 대립되는 자연물이지만, 한곳에 모여 구원의 소재로 기능을 한다.

 이는 희생에서도 마찬가지다. 희생은 타르코프스키가 망명을 떠난 뒤에 만든 작품이다. 그는 이라고 하는 고향의 공간을 불로써 불태운다. 이는 마치 그가 망명해온 구소련에 대한 분신의 일종일 것이고, 그것이 꺼지는 공간에는 물이 있고 비가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곳에서는 안개가 함께한다.

 하지만 트리에는 어떠한가?

 Antichrist의 영화에서 불은 없다. 하지만 오른쪽 그림과 같이 불타버린 나무는 나온다. 불타버린 커다란 나무는 더 이상 치유의 기능을 할 수 없다. 또한 나무의 주변에는 희생당한 시체들만 쌓여져 있다.

 그렇다면 물과 비는 어떻게 등장하는가? 트리에는 영화에서 노골적으로 추락 모티프를 사용한다. 자식도 추락하며 죽고, 떡갈나무도 좋은 자식을 남기기 위해서 도토리를 떨어뜨려 살해하며, 어린 아기새는 떨어져 죽고 만다. 마찬가지로 해당 서사가 이루어지는 부분에서 도토리가 추락하는 것과 같이 비가 추락한다. 이 과정에서 타르코프스키가 의도했던 비가 땅과 만나 형성하는 치유의 서사를 트리에의 비는 구현할 수 없다. 트리에의 비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같이 추락하며, 악마의 교회로 상징이 되는 모친의 자식살해를 은유할 뿐이다.

 특히 안개는 치명적인데, a)에 따르면 트리에의 영화에서 안개는 미쳐버린 W의 정신 상태를 징표할 뿐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안개를 세계를 가로지르는 장막으로 몽환적인 느낌을 내려고 의도했다. 안개가 있는 곳은 신성하며 주요 의미가 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트리에에게 있어 안개는 그저 광기의 심리상태일 뿐이다.

 트리에에 의해 타르코프스키의 상징들은 하나같이 뒤집힌다 불은 꺼져버렸으며, 비는 살해와 죽음을 상징하고 안개는 광기를 상징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트리에가 타르코프스키의 재료로 만든 세계는 지옥이다.

 

 

c)     자연, 여자, 남자 그리고 여자 살해

 

영화에서는 명백히 에덴동산에 대한 모티프가 나온다. 따라서 자연/남성, 여성/ 여성살해를 에덴에 관한 신학적 해석에 근거하여 다루어 보는 것으로 하겠다.

 

성경의 창세기에서 사람의 탄생과 에덴동산에서 내쫓기는 부분을 다루는 챕터는 1에서 3이다

 하나님이 사람인 여자를 만드는 대목은 창세기(2:21~23)이라 할 것이다.[3] 창세기 2:21에서는 아담으로부터 갈비뼈를 뜯었고, 22에서 그 갈빗대로 다른 사람을 만들었다고 말하며, 23에서 그것을 여자라고 부르기로 했다. 24절의 대목이 중요한데, 24절에서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로 적고있다. 이 부분은 해석에 다양한 의견이 있으나, 결혼이나 성교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4] Antichrist에서는 그것을 아래와 같이 실제 몸이 합쳐지는 구도로 그려내고 있다.

비명을 지르는 여자

웃고 있는 듯한 남자

남자를 관통하는 여자
합쳐짐

비명을 지르는 얼굴

여자와 남자의 얼굴이 합쳐짐, 남자의 표정 역시 일그러짐

 

 

 

창세기 3장에서는, (1~5) 뱀에게 여자가 유혹을 당하는 장면, 을 거쳐 3:6을 통해 열매 우선 자신이 먹고 자신과 함께 있는 남편에게 주며, (7~11)그것을 먹은 남자는 역시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고, (12~14) 하나님에게 먹은 경위를 고하며, 3:15에서 여자가 뱀과 원수가 되게 한다. 3:16이 핵심인데,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출산의 고통), 너는 남편을 원하고(성욕, 출산의 욕구)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한다.

 

창세기 3:16에 대한 해석 논쟁은 20세기 초에 창세기 주석을 쓴 헤르만 궁켈[5]에서 시작한다. 헤르만 궁켈은 3:16을 여자로 하여금 남자를 원하게 함에 따라(욕구), 그 원함의 노예 되어 남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는 소극적 지배설을 긍정한다.

20세기 중반의 거트버트 심슨과 월터 보위[6] 3:16절 해석에서는 소극적 지배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상대 성별 중 일방이 다른 성별을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 남자를 원하는 욕망(성욕)에 대해서는 긍정하되, 남성에게 받는 지배는 제반환경에 따라 남자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라 주석을 단다.

1970년의 게르하르트 폰라르[7]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자의 남자를 향한 깊은 욕망을 긍정하나 이것이 남자에게서 성취되지 않고 쉬지 않으며, 여자가 이욕망의 지배를 받는다고 해석한다.

1990년대의 고든 웬함[8] 3:16을 하나님을 배제하고 여성의 소유권을 남자가 갖는 것으로 해석한다. 앞에서 아담이 하와의 이름을 짓는 것은 노예에 대한 이름 붙이기와 유사하고, 여기서 다스리다는 것은 착취적인 예속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다만 욕구로 인한 소극적 지배는 긍정한다.

이후 빅터 해밀턴이나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해당 기술들이 현상을 기술한 것뿐이지 어떤 당위를 기술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한다.

 

여성의 성욕에 대한 요소는 영화의 온갖 곳에서 등장한다.

영화의 시작인 맨 첫 쇼트부터, (2 6)남자와 여자는 섹스를 한다. (17 37)말을 하다가 또 섹스를 하며, 심지어 아이가 자살한 후에도 여자는 (21 07) 고통스러워하며 두려움을 경험하다가 섹스를 하며, (2409) 또 여자에 의해 섹스를 한다. (27 24) 여자는 또 섹스를 시도한다. 중간에 같이 잠을 청하는 장면은 여러 번 등장하나, 같이 잠자리를 갖고 섹스를 안 했다는 확인이 불가능하며, 이는 극단으로 치닫아 (1시간 853)에 자신의 손으로 또 섹스를 하게 된다. 2시간이 채 안 되는 영화에서 섹스신이 보이는 것만 “6이 등장한다.

MW에 대한 공포를 느끼자 W M W를 떠날 것이라 생각하여 M을 나무토막으로 때려 눕힌다. (1시간 15) 그리고서 하는 맨 처음 일이 남자의 성기를 애무하며 정액을 짜낸다. W M이 자신을 떠나게 될까 두려워 M의 발에 쇳돌을 달아 놓는다. 그리고서 도망간 남자를 찾으러 미친듯이 돌아다니다가, (1시간 32 10) 남자의 손으로 자신의 욕망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다가, 모든 것의 원인인 음핵을 절제해버린다. 그리고 서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어라고 비명을 지른다.

 

잠깐 화제를 바꿔서 자연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영화에서의 Nature는 크게 두가지 용례로 사용된다. 하나는 밖에 있는 그 자체로의 Nature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마음의 악한 본성인 Nature이다. (1시간 7 01)에서는 여자들에게 악한 짓을 하게 만드는 nature가 있다고 W는 주장한다. W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고, 여자는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 한다고 하며 자연이 이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영화는 3:16절에 너는 남편을 원하고nature로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W는 닉이 떨어질 때도, 두려움에 빠졌을 때도 어떤 상황에도 섹스를 갈구한다. 심지어 죄책감 때문에 음핵을 절단하지만, 결국 외치는 말은 아무것도 소용이 없어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W는 자연은 악마의 교회고 여자는 자연의 지배를 받는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명백히 여자의 성욕은 신의 뜻이다. 궁켈/거트버슨/폰라르/웬함에 따르면 W가 말하는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성서상의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

Antichrist(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 복음을 적대하는 존재를 일컬어 적그리스도라 한다. 영화에서는 W가 적그리스도적인 것을 행했다. W는 자신의 육체의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했고, 음핵까지 절단하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M을 구속하였다. W는 엔딩크레딧 씬과 같이 Antichrist라고 할 수 있다.

 

이 관점은 여성을 육체에 대한 저항의 주체로 설정해, 마지막의 불에 시체를 태우는 화장은 순교의 장면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관점이 설명해주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W는 왜 자신의 닉의 신발을 거꾸로 신겼고 닉의 자살을 방조 하였으며, 남자와 남자에 의한 여자 살해는 무슨 관계를 갖으며, 수 많은 남자의 시체와 산을 오르는 여자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부분은 안타깝게도 추측할 수 있는 근거는 많이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가설은 세워보며 글을 정리해본다.

l  여자는 원죄를 지니고 있고, 남자는 여자에게서 태어났으며 원죄는 상속된다. 그 원죄는 3:16의 저주인지 축복인지 알 수 없는 명령이다. 극 중 WM은 아담과 이브의 자식들이며, 둘 다 W가 악마의 교회라 일컬었던 자연에 예속되어 있는 자들이다. 에덴에서 W는 자신의 본성을 대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직면하였다. 이는 이후 음핵을 잘라가면서까지 신의 질서에서의 탈출을 감행하는 결과가 된다. M이 합리와 이해를 추구했던 기존의 태도를 갑작스럽게 변화하기 전 W가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두려움을 경험하는데, 이것이 W를 살해하게 된 동기라 할 수 있다.[9] (창세기 3:6에서 자신이 먹어버린 선악과를 남편에게 주는 혹은 유혹하는 하와와 같이)

l  W의 자식살해의 모티프는 성서와 구분되어, 좋은 자식을 얻기 위한 자식살해 행위를 담고 있음. (, 호랑이가 절벽에서 아이를 살해하 듯)

l  숲이 W의 머리와 오버랩되는 장면(50 09)를 생각하면, 숲은 W의 공간. 여자의 마녀화(광기 혹은 자연에서의 벗어남)으로 구속되어 살해된 수 많은 남자들. 그리고 산을 오르는 여자들은 실재하는 여자가 아님, 선악과를 먹고서 의인화 된 수 많은 암컷들을 본 것.



[1] 박대민. (2011, 04 12). `예술 가장한 사기` 논란 부른 문제작 `안티 크라이스트`. Retrieved from Http://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1&no=232175

[2] 이동진. (2011, 05 17).’안티크라이스트생각. Retrieved from https://blog.naver.com/lifeisntcool/130109069299

 

[3] 창세기 1:27에서는 6번째 날에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만들었다 기술하므로, 두 기록한 자의 관점차이가 있다고 보이나, 영화에는 챕터 2가 더 적절하므로 1의 해석은 잠시 배제하도록 한다.

[4] 정두섭 (2003). 결혼의 의미에 대한 고찰¹)-창세기 2 24절을 중심으로-. 대학과 복음, 7, 93-130.

[5] Hermann Gunkel, Genesis, 19, 21, M. E. Biddle, trans. (Macon: Mercer University Press, 1997); Genesis (Goe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01).

[6] Cuthbert Simpson and Walter Bowie, Genesis, George Arthur Buttrick, ed., The Interpreters Bible, vol. 1 (Nashville: Abingdon, 1952), 510.

[7] Gerhard von Rad, Das erste Buch Mose: Genesis (Goe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2).

[8] Gordon Wenham, Genesis 16-50, WBC 2 (Dallas: Word Publishing Company, 1994).

[9] 성경의 디모데후서 1 7절에서 언급된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함.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것이며, 두려움과 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M이 경험한 두려움은 신적 질서로부터의 이탈 혹은 새로운 타락으로 말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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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종합유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