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시 그리스인.
어제 수업 끝나고 종강기념으로 모여서 커피 마시면서 Anti-Child 그리스인들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꽤 인상깊은 결과가 나온듯 싶다.
일단 연애이론에 대해서는 상당히 유사점이 있다. 사실상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순간 이미 상대에 대한 경험을 각자는 갖게되며 경험에서 기원한 '선호'가 발생하게 됨으로, 어떻게든 '관계'는 성립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관계라고 함은, 서로 상대방에게 각자 상대방에 대한 경험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 경험에서 각자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상대방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처음본 관계든 혹은 오래본 관계든, 상대를 싫어하든 혹은 좋아하든, 이미 주어진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방과 자신은 관계를 갖게 된다.(그렇기에 헤어짐을 말하고, 상대방을 잊어버리겠다! 라고 말하는 것은 바보같은 소리에 가깝다. 이것은 관계를 파기하겠다는 소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냥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가 더 이상 연인이라고 불릴만한 관계가 아님을 확인하고 자신의 충족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는것이 더 효율적이라 감히 말한다.) 이 점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그 과정에서 상대방에 대한 태도를 정립하는 과정은 그 과정에 이름을 붙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은 명확하다 할만 하다. 분명히 자신의 마음속에서는 '누가 누구보다 더 좋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더 좋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해당 비교를 타인에게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나는 말한다.만일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에 대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호가 비교가능하다고 말을 해야하는 것임에 분명한데, 선호라는 것이 사실상 서로 다른 방식에 의한 경험에 의해서 도출된 것이라면 그 두 가지가 '동일'하다는, 것은 느껴지는 것 뿐이지 사실상 동일한지 아닌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비교하는 것은 비-경험적으로 '비교기준'을 만들어서 행해야 하는 것인 바, 순수하게 각자 대상을 비교하는 것이 아닐것임에는 분명하다. (이것은 책상위에 놓여져 있는 빨간색 종이가 매순간 같음을 확신할 수 없음에도 그것이 '같다고' 인식하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서로를 같은지 다른지 알 수 없는 각자만의 방식으로 상대방을 지향하게 되는데, 사랑함이나 친밀함 혹은 친구, 연인이라는 관계에 대한 이름은, 상대방과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그 관계에 이름 붙이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상호간의 '합의'에 의하여 해당 관계에 이름을 붙이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해당 관계에 이름을 붙인다.
앞의 두 방법으로 상대방과 자신에게 행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순수하게 관계에 의해서 도출된 바, 언제든 재정립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이 일종의 '자유연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 위의 자유연애 개념과 사회적으로 규정된 채권적 계약연애 개념에 대해서 사람들은 종종 혼동하고는 하는 것 같다. 자유연애라는 것은 가장 기저에 의해서 출발하는 것이고, 채권적 계약연애라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상응하는 '급부'가 예상된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유연애 개념에 대해서는 앞에 서술한 바 있으니, 후자의 '채권적 계약연애'개념에 대해서 약술하자면, 이것은 관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거부하고, 특정 행위를 요청하는 관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내가 당신에게 A라는 것을 주었다면, 당신은 이에 상응하게 나에게 A혹은 B라는 것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런류의 요소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것은 마치 혼인자의 관계에 '충실'할 의무와 유사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케이스는, 고전적 '중매결혼'에서 상당히 잘 드러나는 것 같은데, 당시 관점으로는 '내가 당신에게 애를 낳고 잘 키워줄테니 당신은 나에게 경제적 원조를 하라.'가 그런 류의 말이라고 나는 본다.
이것은 '자유연애'에서의 자연적으로 도출된 관계이자 결론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상대가 아닌 상대가 가지고 있는 다른 것들에 대한 것이 더 크기 때문에, 순수하게 관계에 의해서 출발하는 것이기 보다는 이질적인 규범성이 여기에 개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맺어짐'의 단계이기 보다는 규범에 의하여 그 관계가 성립됨의 느낌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받고 있다.'라는 말을 사용하기 위해 후자의 채권적 계약연애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부류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바람을 피우면 안 된다는 규정이라던지, 아니면 생일 선물을 서로 주고 받아야 한다던지, 그러한 '규범적'인 계약을 도입하고 이것을 통해서 관계적 선호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3. 사람들이 플라토닉한 사랑을 좀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플라토닉한 사랑이 서로 생각이 통함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당하나, 플라토닉한 사랑이 '에로스적 사랑'과 정 상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좋은 친구'로의 관계에서 유지되는 관계라는 것은 물론 매우 이상적인 발상이다. 플라토닉함이 없는 관계는 일종의 동물과 크게 다를바 없고 그 관계에서는 양자 누구든지 충족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플라토닉함만 있고 어떠한 에로스적인 관계가 없는 관계는 오히려 전적으로 동물적인것에서 탈피한 인간으로 보인다. 이것은 오히려 약간 기계같은 것으로 보인다. 같은 논리에서 나는 '독립'으로는 간주할 수 있으나 둘 중 하나가 지양될 것이라고 말하는 관계는 어딘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항시 '동물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임에는 분명한다. 동물적인 사랑과 인간적인 사랑이 동시에 만족된다면 그 가운데서의 '관계'는 더욱이 증진될 것임에는 지당하다고 생각하고, 둘 중에 하나가 불충족한 관계가 발생하게 된다면, 그 비어있음을 해당 관계가 아닌 다른 관계에서 찾으려고 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정신적으로 혹은 말로써 '교감'하는 관계에 대해서는 상당히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주로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점으로써 나는 이 점을 증명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에로스적인 사랑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한다면, 이에 대해서는 '확답'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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