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휴일을 맞이하여 긴 잠을 잤더니, 노트북을 두드리는 나의 손놀림이 현저하게 둔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또한 긴 잠을 자서 머릿속을 가득차고 있는 피곤함이 소실되니 뭔가 스트레스는 덜 받는데 뭘 하고 싶은 욕구는 크게 없다. 난 보통 글을 쓸 때 나의 내적 갈등에서의 고뇌에서 유발되는 표현욕구에서 기인하는 스트레스를 자주 이용하는 편인데, 내가 오래된 기독교도 중에 흔히 '방언이 터진다.'는 경험을 해본적이없기 때문에 이 비유를 사용하는게 적절한지는 알기 어려우나, 마치 방언을 하는것과 같이 쉴 새 없이 생각나는 것을 정리해 나가다보면 어느새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도달하게 된다.
사실상 표현되는 언어라는 것은 단순히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생각의 바다 위에 높여진 부표일 뿐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이 글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주장한다. 보통 규범적으로는 그 부표가 상대방의 부표와 상호비교에서 엄밀하게 사용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설령 내가 사과라고 말하는 것에서 조차 상대방이 사과라고 말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확신을 갖지 않는다.
난 타자에게 의식이 있음을 전제해도, 혹은 타자에게 의식이 없음을 전제해도 그 두가지 방향 모두에서 상대방과 나의 '용어'가 형식적으로라도 실질적으로라도 같게 보기 어렵다는 추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후자의 '타자에게 의식이 없음'을 전제로 한다면 이것은 내 사고상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전자의 '타자에게 의식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면 여기에서는 추가적인 '논증'이 제시되어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과거의 담벼락에 이미 적어놨던 것과 같은데, 나는 사과라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의 형성에 있어서 그 개념을 외부에 있는 '사과'라는 것을 엄밀하게 나에게 가져옴으로써 형성한것이기 보다는 그것에 대해서 감각적으로 지성적으로 개념들을 종합함으로써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감각적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대상들을 경유해서 얻어진 앎이라고 나는 말하며, 지성적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 형성한 나의 앎에 대해 끊임없이 연장되는 현재에 대해 추론적으로 연장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을 한다.
지성적 앎과 감각적 앎에 대해서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지성적 앎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끊임없는 연장과 체계성을 의미하며, '감각적 앎'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 그 자체의 '일시적인 앎'이라고나는 말한다. 전자의 '지성적 앎'은 판단으로써의 앎이며 후자의 감각적이라는 것은 경유하여 대응함의 앎이라고 나는 규정한다.
여기서의 지성적 앎과 감각적 앎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대한 감각이다. 과거 시간의식을 논할때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나는 T1, T2 분명 다른 '시점'에서 본 빨간색을 같은 빨간색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대상을 지칭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나에게 그 판단을 유발시키는 어떠한 판단의 준거가 주어져 있지 않다. 나는 빨간색이라고 대상들을 지칭하지만, 그것들이 엄밀하게 빨간색임을 검증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대상들을 같은 빨간색이라고 지칭을 한다. 그리고 또한 T1에서 주어진 빨간색과 T2에서 주어진 빨간색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비교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T1과 T2는 개념상 구성된 시간적인 '연장'에서 논하는 시간개념을 의미한다. 실재하는지도 모르는 실재계의 시간을 전제하여 시간의 부표를 그 위에 올린다고 하기 보다는, 의식의 흐름에서 추론된 순간을 의미하며, 여기서의 순간이라는 것은 매순간 경험하는 '현재'를 의미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 하지만 이 논증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제기 된다. 이 부분은 현준이 형이 제기한 문제랑 그 맥락을 같이 하는데, '만일 김효영이 말한 것과 같이, 순전히 나의 앎이라는 것이 대상으로부터 경유하여 주어진 것이라면 최초 사과를 목격하는 과정에서, 과연 사람은 T1과 T2에서 말해지는 '사과'라는 것에 대해 개념을 형성함에 있어서 어떻게 동일한 개념의 연장으로써 '추론적 앎'을 형성하느냐가 바로 그것이다. ( 쉽게 말하겠다. T1의 사과와 T2의 사과가 같은 사과임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으며, 그렇게 본다면 '사과'의 개념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대상들에 대해서 사과라는 개념 자체를 구조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안을 한다. 사과라는 것을 구성하는 '지성적 앎'에 대해서는 '감각적 앎'이 선행하여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나에게는 이미 감각적인 것에 대한 것은 주어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는데, 대상을 경유하여 그것을 인식할 때, 내가 보는 그것은 마치 검은 밑그림이 그려진 스케치북과 같다는 것이다. 나는 해당 '스케치북의 비유'가 꽤 큰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 어린아이들이 그리는 검은색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스케치북을 생각하라, 그 스케치북에 구획은 분명히 있다. 그 구획위에 보통 크레파스로 색칠을 하는데, 그 색칠은 감각적 앎이요, 그 구획과 감각적 앎이 결합된 것은 '지성적 앎'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그 공란에 크레파스로 색칠함에 있어서, 그 색의 동일성에 대한 '믿음'은 연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T1에서 관찰한 빨간색과 T2에서 관찰한 빨간색에 대해서 나는 같은 빨간색이라고 지칭하지만, 그 두색을 빨간색으로 지칭함에 있어서, 빨간색이 아님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개별 결합에 대해서 '의심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대상의 '지성적 앎'을 구성할 수가 있게 된다.(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은 명확하다. 최소한의 결합인 '감각적 앎'[대상을 경유하여 주어진 앎]에 대해서 조차 만일 '확신'을 갖지 않다면, 대상의 유사성 혹은 동일성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없으며 나는 대상을 '판단'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색에 대한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목격한 '사과'는 나에게 사과와 사과가 아닌것, 그리고 사과와 다른 사과를 구분할 수 조차 없게 만들것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내 안의 동일성조차 구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타자의 '의식'을 전제해보았자, 의식의 전제에서 어떠한 것도 '의미있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은 첫번째 근거로 제시될만하다고 본다.
다음 논거는 앞의 '지성적 앎'과 같은 측면에서 형성이 되는데, 앞에서 말했다시피 '감각적 앎'은 '지성적 앎'에 대해서 선행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감각적 앎이라는 것이 만일 '대상을 경유해서 얻어진 앎'이라고 한다면(대상을 경유해서 얻어진 앎이라는 것은 나에게 주어져있는 것을 대상과 대응시킴으로써 대상을 인식한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이는 나에게 있는 것으로써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지, 감각 너머의 세계를 보는 것은 아님은 분명하다. (설령 감각 너머의 세계를 본다고 해도 이것은 그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다.[여기서 의미라 함은 대상에 관계하는 명확한 나의 '앎'을 말한다.]) 따라서 설령 상대의 의식이 실재한다고 해서, 그 실재함에 대한 전제가 어떠한 '의미있는' 결과물을 제기해줄 수 없으며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의미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의미 없는' 것이기에, 타자의 '감각되지 않는 의식'을 감각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기에 배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