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리 개소리 개소리'에 해당되는 글 117건

  1. 2015.09.18 가면
  2. 2015.05.10 결혼 단상
  3. 2015.04.30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4. 2015.04.27 잡설
  5. 2015.04.20 세월호 시위에 대한 단상.
  6. 2015.04.17 맬서스
  7. 2015.04.15 나의 법.
  8. 2015.04.15 공감이라는 단어의 횡포, 강요, 무서움
  9. 2015.04.15 의식 동일성 연장
  10. 2015.04.15 3-1, 홉스를 생각나게 만드는
밤에 쌓인 스트레스가 오전장에 풀리지를 않는다. 숙취보다 더하다.

   항상 그렇듯 온 몸에는 날이 서 있고, 건조해서 황량한 벌겋게 충혈된 눈은 껌뻑거리며 조금의 잠을 청하지만, 상황이란게 늘 그렇듯 '네가 힘든건 알겠지만 앞으로 추석때까지만 참아다오.' 하면서 자문자답 해본다.

  한때는 글을 잘 쓰고 싶다고 발악도 했지만 지금은 글 잘쓰는것도 필요 없고 많이 아는것도 필요없고 어디가서 한 숨 잤으면 좋겠다만,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학교에 가는 전철을 탔다는 점. 그리고 그 순간에도 나는 자리에 앉지 못해 새우잠도 못 청하고 이렇게 스마트폰을 들고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보니 나도 천상 노답이다.

 피곤하면 몸 구석구석이 마치 개미가 기어다니듯 저릿저릿하다. 손가락이든 발가락이든 종아리든 팔목이든 가리지 않고 온 몸이 저릿대는 그 느낌에 참지 못하여 나는 에너지 드링크 하나를 뽑아 마시는데, 그 에너지 드링크라는 놈은 참 진통제로 역량이 뛰어난것 같아 머릿속의 고통도 몸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히스타민 반응도 잠깐이나마 무감각하게 하지만 약빨이 다 떨어진 후 더욱 민감해지고, 멍한 정신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후회감은 스스로를 더 절망적으로 만든다.

 어제 올렸던 페이스북의 '가면 자살'에 관한 소설의 제목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검색해보아도 나오질 않고 집에 쌓여있는 교재를 찾아봐도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내 색인 능력이 안 좋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환각을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가면이라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지도.

 내가 나의 고통을 인지하지 못하게 가면을 만들어보자. 그 가면은 쓸 데 없이 가볍고 방정맞으며 마치 모든것에 관심이 없고 무관심해야한다. 공부하는 내가 실제 모습이 아니라 공부하는 내가 가면이고 사실 나는 좀 더 자유롭고 외향적이며 피로도 느끼지 않는 지극히 외향적이고 건설적인 건강한 20대 초반이라고 세뇌를 걸어보자.
 
 오늘 하루도 활기차게 오늘 하루도 즐겁게 갓 대학교에 입학한 신입생의 모습을 스스로에게 투영시키고 고통 따위야 만들어낸 껍데기에 불과하다며 되뇌어보자. 

'오늘도 즐거운 하루,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은 항상 재미있어!.'

Posted by 종합유추

1. 한국이나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에는 공통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 같은데, 그 가운데 중국과 한국의 경우에는 제사를 지내는 양식이 유사하다.

 중국에서는 토속신앙으로 자신이 죽으면 저승의 세계에서 똑같이 생활한다고 생각한다. 그 때 생활하는 방식은 이승의 자식들이 제사를 통해서 지내준 밥이나 떡고물을 먹으면서 연명하는  것인데, 죽은 령도 곧 사람과 같지만 이미 육신을 떠난 몸이라 영만 남아 저승에서는 죽지 않는다.

 이런 령이 제사를 받지 못하면, 굶고 악에 받쳐 악귀가 되는데, 악귀가 되면 환생도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제사를 지낼때 위로 3대까지는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한다.

 이런 신앙의 목적이 인위적인 행정의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혹은 자연발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없는 부모들의 경우에는 이런 이유에서 친족으로부터 아이를 입양하는 경우가 흔하다.


2. 전형적인 부계사회라고 말을 하며 이것이 부정적인 어감으로 쓰여지는데, 남성혈족을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부계사회라고 하는지, 아니면 가정내에서 남성의 권력이 강한 것을 부계사회라고 하는지는 사실 잘 구분하기 어려워 보인다.

 통상적으로 부계사회라하면 권위적임을 말하는 것 같은데,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그것은 전제적 정치구조 하의 가족구조가 갖는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실질적인 부계사회 일반이 모두 그런 특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3. 구규범과 수입되어 온 신규범의 충돌은 기형적인 환경을 창출해냈다.

 과거에 부계사회 일반에서 혼인이라는 것은 여성이 자신의 혈족집단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혈족집단에 일원으로 포함되는 형식이었다. 그 가운데 여성측에서는 지참금을 받거나 혹은 주거나 혹은 그냥 몸만 가거나 하는 세가지 선택방법이 있었다.

 보통 여자측에서 지참금을 주는데에는 다른 가구에 포함될 자신의 여아를 잘 봐달라는데 그 목적이 있고, 여자측에서 지참금을 받는 경우에는 남편측에서 그 여성의 가구에 잘 키워준데에 대한 대가로 주는 경우였다.

 그 가운데 과거의 경우에는 여성이 남자의 집으로 들어오는 구조이기 때문에, 굳이 결혼 이후에 남자측에서는 비용이 발생하지 않았다. 여자는 집으로 들어오면 되는 것이고, 자신의 혈족 가정에서 제공한 혼수를 바탕으로 시부모와 함께 집안일을 잘 이끌어나가면 되는 것이며, 남자는 여자를 잘 먹여살리면 되는 것이다.

 이게 오늘날로 내려오면서, 시집살이에 대한 공론화 등에 따른 문제와 더불어 과거에는 부모가 자식부부와 같이 살면서, 이전의 경우에는 별도로 독립한 하나의 가정을 이루기 전까지는 부모가 자식부부의 양육문제나 거주 문제를 해결했지만, 점차 여성이 시부모와 같이 사는것을 혐오하기 시작한다.

 이런 경향에서 남자는 결혼할 때 여성에게 두가지를 묻는데, 하나는 여자가 시집에 들어와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출을 받든 월세를 살든 전세를 살든 매입을 하든 별도로 집을 하나 구매하여 별도로 사는 방식이 그것이다.

 과거에는 여성이 시집살이를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았다면, 최근에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로 변화함에 따라서 전자보다는 후자의 선택을 하는 경우가 늘어났다는 점.

 그런 가운데 전통적인 책임인 남자는 거주할 곳을 마련하고 여자는 그 가운데 살림을 장만하던 방식에서, 남자가 따로 거주해야할 새로운 집을 장만해야 하다보니 혼인에 있어서 남자의 부담이 증가하는 것.

 여성운동가들에 의해서 호적에서 형식적인 부계구조가 폐기되고 법 앞에서는 평등한 구조가 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가족제 사회의 전통인 남자가 집을 마련하고 여자가 혼수를 마련하는 것이 유지되고 있는 것.

 한국에 태어나서 거주하는 사람이 서구의 변화한 혼인풍습과 한국의 그것을 비교함에 따라서 남성들도 기존의 가족제 전통에서 출발한 전통을 지켜야 할 이유는 없어지는 것.

 이런 가운데서 남자가 집을 장만하고 여자가 혼수를 장만하여 결합한 부부의 경우에는, 남자집안에서는 당연히 시집살이 문제가 제기될 수 밖에 없어 보임.

 

Posted by 종합유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조교생활도 나름 재미있는것 같다.

애들 과제 채점 매기는데, 내가 법학 공부하는 티를 조금 냈더니 무슨 이상한 기소장을 작성해왔다.

아 이거 어쩌냐 ㅋㅋㅋㅋ 분명 병신같은데 웃겨서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네

Posted by 종합유추

1.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고자고 외치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회를 망치는데 일조한다는 사실은 역설이다.

 

2. 누구든 말로는 중력도 거스를 수 있고, 하늘에 있는 별도 따올 수 있다. 결국 그 가운데 따져야 할 것은 정말 하늘에 별을 따올 수 있느냐와 하늘에 있는 별을 따오는게 그렇게 비용 대비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누구든 말로는 이상사회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따져야 할 것은, 정말 그런 이상사회가 현실에 구현될 수 있느냐는 것과 그것을 현실에 구현했을 때 만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과도한 희생이 끊임없이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이상사회냐는 것이다.

 

 

3. 개인적으로 운동권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친구중에 운동권 사람은 많은데, 왜 그런지야 나도 모를일이다. 내 경험상 그들의 주장은 대체적으로 현실성 없고, 교육체제가 만들어낸 신념의 부산물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유 평등을 말하지만 그들은 정작 어떤 상태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이고 어떠한 상태가 본질적으로 평등한 상태인지에 대한 논술을 하지 못한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가자고만 주장한다. 자신들의 말에 따르면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심히 무례하고도 오만하며 선동적인 발언으로 보인다.

 

  나는 직관적으로 내 앞에 있는 것이 나와 같이 사람이라는 종으로 불리는 것을 알지만, 외형의 유사성을 제외한다면 저자와 나는 분명히 '다른 존재'임을 안다. 이 두가지의 존재를 평등하게 대하기 위해서는 그 두개가 같음을 말해야 한다. 법의 추상성, 다시 말해 법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는 개념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법 앞에서의 평등이 말하는 것은 마치 수학에서의 개념과 같다. 수학의 1은 1과 다를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1과 1이 같다는 것은 모두가 합의한 약속에서 비롯된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사적언어와 공적언어'의 문제를 연관하여 지금 말한 1과 이후에 말한 1의 본질의 속성이 동일한가에 대해서 묻는다면, 그것은 생활세계에서 상대와 내가 합의한 1의 개념에 대해서 너무나 추상적으로 접근한데 있다 할 것이며, 여기서의 논의는 1=1 수준의 자명함과 같은 인간이라는 종적 분류이다.

 

 사과 한개, 배터리 한개, 종이 한개 이런 여러 물질의 수를 셀 때 나는 '한개'라는 말을 사용한다. 여기서 한개라함은 대상에 대한 개념적 구분이 대상인것과 대상이 아닌 것 두개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가운데 대상의 개념이 지향하는 것에 대해서 대상이 아닌것을 포괄하여 대상이 아닌 것에 대상인 속성을 갖는 것이 없다 할 때 그것은 한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심히 인지적이며, 상대가 나와 같은 인식적인 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법 마치 이와 같다. 법에서 규정하는 자연인과 법인은 이런 색채이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공통적인 속성으로부터 인간 일반의 개념을 도출하고, 도출한 인간 일반의 개념에서 그 개념의 색채를 정의한다. 이는 1을 정의하고 1 + 1 = 2, 1 * 1 = 1, 1 - 1 = 0 의 규칙성을 발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수학에서는 +와 - 그리고 *  /를 사용하지만 법에서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행위가 가지고 있는 규칙성을 분석하여 그것을 체계화하여 어떠한 규칙으로 추상화된 개별 인간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책임을 규정하고, 그런 프레임 내에서 끊임없이 순환하는 하나의 순환시스템을 형성해내는 것이다.

 

 또한 그 일반적인 순환시스템 위에, 그 순환시스템을 다시금 검토하는 새로운 점검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고, 이것이 결국 성문법의 엄격함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 항상 학설상의 문제가 등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렇다면 + 의 규칙은 무엇인가와 -의 규칙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을 넘어서서 내가 말하는 + 와 당신이 말하는 + 가 같은 +냐 하는 것이 결국 그런 문제인데, 이것은 다시금 원자적인 동일성을 넘어서서 분자적인 동일성에 대한 물음으로 연결된다. 결국 강학상의 문제로 논거되어 최적의 설명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정과 반의 결합으로 합으로 나아가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속에서 목적지는 없다. (헤겔은 절대지성을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절대지성은 그냥 목적에 대한 추상적인 표현일 뿐 실제로 헤겔도 절대지성이 무엇인지 모르고 단순히 지향하는 방향에 대해서 표현하기 위해서 차용한 지성이라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순환을 하든 혹은 방향성이 있든 그것은 합의의 효력으로 합의 이후에 나의 통제가능성을 일부 이양함으로써 공준된 합의체제내에 자신의 의사를 포섭하는 그런 것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감정적인 것을 합의했던가 아니면 이성에 합의했던가, 따져보고 논의하여 그 결과 나타나는 노력에 기울인 것이 설득력을 가질 때 너와 나는 이 사회에서 합의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런 가운데서 이런 '합의'의 속성이 나와 상대가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것과 전혀 같은 층위에서 논구되어서는 안 된다는 굉장히 자명하고 추론적인 사실을 부정하는 자들에 대한 반감은 내 생각에서 보았을 때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내 생각에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척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기하학과 같이 매우 자명한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4. 사회를 유지해야하는가 혹은 사회를 유지하지 말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사회에서 벗어나려 한다. 반사회적으로 행동하고, 교육이 필요없다고 하고 사고의 통제가 필요하지 않다 말한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사람들은 서로 필요해서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런 가운데 사회 밖에 있는 위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사회 밖을 동경하고 사회의 체제를 붕괴하려 하는 것은 다시 공포과 기근 굶주림으로 자신을 던지는 그야말로 무모한 짓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한다면 그래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나와 당신들이 만든 '합의의 규칙'이고 그런 합의의 규칙에서 내가 마지막까지 그 결과의 발생을 예방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그것을 원한다면 그들에게 그런 결말을 보여주는 것이 적합한 것이다.

 

 한국은 1950년대 북한과 대립각에서 발생하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자립적으로 산업조직을 구성하고 제조업 위주의 생산시스템을 형성하여 국가의 이름으로 국채를 발행하면서 끊임없이 현재까지 국가를 발전시켜왔다. 하지만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특유의 위험성과, 처해있는 환경은 앞으로도 위기에 고통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어찌보면 한국의 상황에서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노동환경이 다른 국가에 비해서 좋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어찌보면 모두가 생존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체제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 복지를 논하고, 환경이 전혀 다른 국가를 이야기하며 한국도 그럴 수 있지 않냐고 묻는다. 일종에 보편에 대한 환상, 어디든 같은 정책을 취할 수 있다는 그런 비교의식은 한국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통찰이 없는 말 그대로 유아적 칭얼댐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유아적 사고를 가진 자들이 다수고, 그자들이 그런 선택을 하여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나가길 바란다면, 보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탈출하여 다른 국가로 갈 수 있다고 하여 간다면 그것은 나를 키워주고 먹여주며 가르친 한국에 대한 의무 불성실이다. 이것은 내가 배운것에 적합하지 못하다. 기울어져 가는 배에서라도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해가며 배를 다시금 움직이게끔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스러져가는 국가라는 배에 타고 있는 지식인의 책임일 것이다.

 

 아버지의 책임이란 이런것이 아니던가.

 

 

5. 그런 이유에서 죽음은 나에게 삶이라는 의무로부터 자유를 준다.

Posted by 종합유추

1. 유병언이네 회사는 박근혜 전부터 있어왔다. 비슷한 행태가 얼마나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1999년경부터 활동했던것으로 보아서 2년동안만 활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책임의 문제가 전적으로 박근혜에게 귀속되기 위해서는 전대 행정부 혹은 전전대 행정부와 전혀 독립적인 박근혜 정부와의 커넥션이있었어야 박근혜에게 문제를 귀속시킬 수 있겠며. 박근혜 행정부때 관련 조직기관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행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으며, 조직기관의 인사에 박근혜 수뇌부에 직접적인 연관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입증되지 않으면 박근혜 정권에 책임을 귀속시키기 쉽지 않을것.

 

2. 책임문제는 굉장히 중요하다. 자신이 엄격하게 책임질 부분과 책임지지 않을 부분을 구분하여 말하는 것이 필요하고. 책임지지 못할 부분에 대한 약속은 하지 않는것만 못하다. 혹자는 그럼에도 대통령이기 때문에 책임지는 어투로 말해야한다는데, 안전이란것을 완벽하게 성취할 수 없다는 점에 미루어보아 애초에 언제는 사고는 발생할 수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약속했다가 나중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데다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신뢰없는 정부가 될 바에야 처음부터 말을 하지 않는게 최적이다.

 

4. 신참 회계사도 처음 직무 맡으면 아무리 잘 배웠어도 3년은 굴러야 제대로 된 업무를 한다. 이건 변호사도 마찬가지고 의사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숙련된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제 실력을 발휘하기 까지에는 업무와 관련해 습득할 것이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도대체 정부 바뀌면서 장관 몇번 바뀌었고 직속 부서 몇번 바꿔놨는가? 대통령 임기 길어야 5년이다. 아무리 뛰어나도 2년은 있어야 자기 위치를 파악하고 업무능률이
향상된다. 빨라야 처음 부임하자마자 2년쯤 되어야 본격적으로 업무를 진행한다는 것. 중반에 바꾸면 익숙해지기도 전에 임기 끝나고 퇴임한다. 말 그대로 쉬운게 아니다. 도대체 몇번 장관 총리 교체해야하나? 적당히 좀 해라

이건 국가의 합리적 의사결정을 전면적으로 방해하는거 아닌가? 국가가 결국 망했으면 좋겠나? 도대체 누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가?

 

5. 저널리즘? 신성한 기자의 의무? 독립잡지? 의사결정 혼란만 가져온다. 알 권리를 증진시키기는커녕 정보 하나 구하기 힘들어서 자극적인 기사 찍찍 써내는게 저널리즘이라면 나도 내일부터 신성한 저널리즘 지켜가며 말하는 훌륭한 기자가 될지도 모른다.

전문가도 쉽게 결정내리지 못하는 사안에 대해서 기자라고 말을 찍찍 내뱉는다. 사실 관계는 또 얼마나 검증됐는가? 그래 그게 중요하던가. 많이 읽혀지는게 중요할 것. 장인정신? 기자정신 필요없다. 그
것은 인기로 상쇄된다.어떤 찌라시에는 의학저널에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이해 전혀 안 되는걸 마지막 결과만 딱 짤라서 인용해놨다.

이건 특히 모욕죄에서 심각하다. 사실관계? 안 본다. 법리? 안 본다. 자극적이면 된다. 판사는 법리에 맞춰 엄격하게 판단했으나 사실과 판시사항이 자극적이면 된다. 게임에서 욕하면 무조건 고소가능하다? 그래 고소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죄확정은 다른 부분이다. 전후 맥락 다 생략하고 판결이 있다 이야기한다. 얼마나 자극적인가? 그게 기자라면 나도 내일부터 금감위가서 사례만 잔뜩 모아서 글을 내면 되겠구나.

차라리 독립잡지같이 영 이상한 신문 보지 말고. 변호사신문 법률신문과 같이 전문가들 집단 신문을 봐라. 그게 유익하다면 더 유익할 것이다

7. 부모는 산에 묻고 죽은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 했다. 죽은 사람을 대체로 사람들을 잊으려 노력한다. 세월호 때문에 자식을 잃은 부모들 마음이 얼마나 애타겠냐만은, 도대체 누가 근 1년동안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이가 죽었다고 마음을 후벼팠는가?, 끊임없이 그들의 아이가 죽었음을 상기시켰으며 그걸 유지시키고 있는가?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 원래 그나마 잘 살던 사람들까지 죽은 사람한테 목 메달게하면서 그 사람들이 말하는건 그게 정의란다. 그게
정말 정의냐? 이건 예전에 이념가지고 총 칼 쥐어주고 가서 싸우라고 했던 그놈들과 뭐가 다르냐. 세월호 희생자들 부모의 업무상 공백으로 인한 경력 단절은 어떻게 할거냐 17에서 18의 아이를 둔 부모는 20에 결혼해도 40이다. 지금 일해야 노후를 보장하는 시점이다. 그 사람 미래는 중요하지 않고 그 사람들을 이용하는 사람은 누구더냐? 또 국가 탓을 할건가? 도대체 너와 나의 국가는 마치 신과 같아서 모든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주는 어머니같은 존재였나? 아니면 너와 내가 세금내서 관리를 담당하는 집사같은 존재였나

어떤 빌어먹을 놈들이 산자의 목숨과 죽은 사람의 목숨으로 국가와 딜을 하고 있던가?

진정 사악한 놈들은 누군 목숨이 달린 경주를 펼치고 있는데, 옆에서 그거 즐기면서 돈 걸고 내기하는 놈들이다.

타인의 아픔을 공감해준다고 하는데 도대체 상대방의 아픔에 대해서 경험한적도 없고. 그 고통이 같은 고통인지 확신도 못하는데 공감을 한다? 예전 현상학시간에 어떤 여자가 인간은 상대방의 고통과 같은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더라. 차라리 공감같은 가식으로 상대방을 위로하기보다는 실질적으로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이나 하는것이 낫다.

그 공감이라고 말하는 빌어먹을 작태는 너무 값싸서 마치 누구에게든 표현만으로도 취할 수 있는 것이라. 마치 공감을 할 때는 감정적으로 부족한 거지에게 적선을 하는 느낌이다. 최소한 상대가 감정을 동냥하는 사람도 아니고 낮은 가치에 값싼 푼돈 하나 던져주며 자신은 마음의 위안을 얻는것이 그렇게 만족스럽고 고귀한 행동인가?

다른 사람의 행동에 고통을 느낀다면 공감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적게하여 희소성을 높혀 표현을 하던가 직접 가서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실천적으로 돕는게 그딴 빌어먹을 말 한마디의 값싼 공감 푼돈보다야 훨씬 괜찮을 것이다

 

세월호를 언제까지 잊지 말아야하는가? 그들의 부모는 계속 세월호를 잊지 말고 그들 자식이 죽은걸 보면서 평생을 고통속에 살아야하는가? 당신의 어머니가 죽었다. 누군가 옆에서 당신에게 1년동안 계속 어머니가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어머니가 죽은걸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심각한가? 이건 정신나간짓이다.
추모는 조용히 하는것이지 시끄럽게 다 외치면서 하는게 아니지않는가?

Posted by 종합유추
전통적인 의미의 순결을 설명함에 있어서 맬서스의 양성제어(positive check)와 예방적 제어(preventive check)에 대한 논의는 세련됨을 넘어서 탁월함을 보인다.

전통적 시스템의 한 부족내에서 존재하는 인구의 숫자는 그 부족의 존속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이었다. 토지에서 나올 수 있는 생산성은 한정되어 있고 구체적인 피임의 방법 자체가 마련되어있지 않던 그 시절에 청춘 남자와 여자를 한 방에 몰아넣고 10개월이 지난 뒤에는 최소 3명 이상의 사람이 되어 나올(임신에서 쌍둥이까지 생각하라) 가능성이 크다고 맬서스는 밝힌다.

맬서스는 그 가운데서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과 유사한 개체를 만들어내는 번식욕구를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그런 전제는 많은 부족 집단 혹은 국가라는 시스템 하에서의 행정구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고, 소속된 사람들은 종종 그들의 주변 생산성이 버틸 수 있는 최대치만큼의 자손을 갖곤 했다. 그 가운데서 맬서스는 인구의 수가 가져오는 두가지 양상인 양성제와 예방적 제어를 말한다.

여기서 양성제어라함은 기근 혹은 좁은 밀도에 높은 인구가 몰아 살면서 발생할 수 있는 일종의 전염병과 같은것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인구가 줄어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의미하고, 예방적 제어라함은 그 가운데 그 집단의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규칙을 정하여 전체 집단의 인구의 수를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것이다. 

식물의 생산에 있어서 고전적인 야생상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집단의 경우에는 예방적 제어에 비하여 양성 제어의 가능성이 크게 나타난다. 매년 수확량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확량이 좋은 시점에서의 사람들은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낳고, 수확량이 좋지 않은 시즌이 다음해에 닥치면 사람들은 모두가 같이 굶거나 혹은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거나 혹은 다른 부족과 전쟁을 하여 다른 부족에서 양식을 약탈하거나 혹은 인육을 섭취하는 방법을 채택한다. 

그에 반해 예방적 제어의 방법은 그 인구의 숫자를 규범이라는 이름하에 자체적으로 조절하는 것이다. 대개 이런 형태의 규범은 그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장로나 혹은 연장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데, 무조건 많은 아이를 낳는것을 금하기 위하여 남자와 여자를 일정나이까지 결혼을 못하게 한다거나, 혹은 남성을 고된 노동으로 혹사시켜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동시에 성욕을 감퇴시키고. 집안에서 가사를 담당하는 여성의 경우에도 같이 밖에서 혹사를 시킨다거나 아니면 여성의 성적인 쾌감을 느끼는 음핵을 어린 나이에 절제하는 것을 일종의 규범으로 만듦으로써 여성의 외도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배제하고 부부사이에 별도의 욕정의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금하여 근면성실하며 동시에 적은 인구의 출산을 목적으로 한데에 있다 하겠다.

언듯보면 굉장히 야만스러워보이지만 인구의 수를 조절함에 있어서는 그것은 정말로 탁월한 방법이었고, 이런 규칙을 지키지 않는 부족은 필연적으로 양성제어를 맞게 됨으로, 인간의 본능적인 성욕을 제어하여 인구의 수를 줄일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맬서스의 관점에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순결의 개념과 한국내에서의 순결의 개념은 일종의 규범으로써 예방적 제어에 해당할 것이다. 결혼하기 전의 여성에게 순결을 권하고 이를 강요함으로써 결혼이라는 의식을 거쳐야만 그에 따른 아이를 출산하게 되는 방법을 채택하고, 또한 그 가운데서 남성과 여성이 아이를 양육할만한 충분한 능력이 되어야 실질적으로 그들의 아이를 효과적으로 양육하게 만들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에서 남성의 생산성이 담보되어야 하는 것이고 여성은 조신함과 집안의 일을 잘 하는것이 요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물질적 풍요 이후 순결 자체가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왜 오늘날에도 순결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순결시스템이 결혼의 선제조건이 되는 방법으로 그 명맥을 이어왔다고 본다.

이를 1980년대까지 혹은 지금까지 한국에 행해지고 있는 순결과 결혼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조금은 이해해 볼 수 있겠다. 남자는 결혼에 지참하는 것이 집과 적합한 생산성을 가질 수 있는 직업이었고 여성은 그 집안을 구성하는 혼수였다. 이것은 관례적으로 그래왔던 것이고, 그런 전제가 있어야 그들의 아이를 효율적으로 양육할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순결에 대한 것은 결국 이런 물질적 전제가 되어야 그들의 아이를 좀 더 적합하게 기를 수 있기 때문에, 여성은 결혼전에 몸을 함부로 놀려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 아이를 양육하기가 쉽지 않고, 더욱이 그 아이를 사랑만으로 기를 수 없다는 굉장히 자명한 어구는 남자에게도 적용되어 생산성을 갖추는 훈련이 온전하게 되지 못한 남자도 이 부분에 적용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현재까지 행해지고 있고 아직까지 지켜지고 있는 혹은 권해지고 있는 순결에 대한 개념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규범의 원리를 나이드신 분들이 이해하든 혹은 이해하지 않든 그들의 자손에게 혹은 어린 아이들에게 권하는 이유는 어찌보면 그들의 후손이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할 것이며, 이것은 악습이 아니라 오히려 양속의 한 명맥이 닿아 있다 할 것이다. 

물론 이런 반박이 있을지 모른다. 오늘날에는 콘돔이나 혹은 인공낙태와 같은 확실하게 그들의 아이를 낳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해당 방법을 통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때에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며, 굳이 순결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하겠으나, 콘돔도 역시 항상 임신의 가능성을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으며, 여성의 경우에도 끝없이 낙태할 수 있을만큼 자궁이 건강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의 적령에 있는 남성이 여성을 부양할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할 경우 왜 순결한 여성을 찾으려고 하는가 한다면, 그것은 자궁이 건강한 여성을 찾고 자신의 자손이 건강하기를 기대하는 심적 상태일지도 모르겠으며 더 나아가서 순결을 쉽게 지키지 않는 여성이 자신의 몸이나 아이에 대한 책임감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은 사회가 분명 바뀌었다. 과거와 같이 남자가 밖에서 일하고 여자가 집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둘 다 밖에서 일할 수 있는 생산성의 증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한 아이의 양육비용에서 교육비용이 차지하는 부분이 급속도로 증가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과거에는 밥만 먹여주면 혼자 알아서 다 했을 아이, 게다가 집안에서 가사노동을 돕고 농사일을 도왔을 아이가 오늘날에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야만 그 아이가 제 기능을 할 것은 오늘날의 과도하게 커진 교육시장과 암묵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명문대학생에게 요구하는 고액과외와 같은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순결과는 별개로 이런 이유의 쓸 데 없는 과도한 아이에 대한 투자와 그것을 조장하고 그것으로 먹고사는 비생산적인 집단과 출산율 및 결혼율의 감소는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다음 세가지 질문는 던질만하다.

1.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가난을 겪는 이유는 결국 그들의 생산성이 아이를 키우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에게 예방적 차원의 관습이 주어져 있지 않고, 가장 원시적으로 생산량만큼 아이를 출산하는 동물적 욕구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을 때, 그들이 가난하여 밥을 먹지 못함에 연민을 느껴 그들에게 한끼 밥이나 식사를 제공해주는 것은 한정된 생산성에서 자체적으로 결정되어야 할 인구수의 왜곡을 불러오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유니세프의 지원이나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한 지원은 정말로 단기적인 해결만 가져올 뿐 장기적으로는 그들을 더욱 더 괴롭게 만들고 그들에게 지원한 자원을 전혀 무용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는 얼마나 바보같은가?

2. 아프리카에서 아직까지 이행되고 있는 여성할례에 대해서 인권단체들이 야만적임과 미개함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그들이 원래부터 유지해왔던 인구를 조절하는 방법을 전면적으로 상실하게 되어 그들은 다시금 양성제어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여성의 성적쾌감을 위해서 그 부족 전부의 생명을 위협하는 그들의 작태는 정당한가? 

3. 본연의 여권신장을 시위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오히려 이런 측면에서는 여권신장이 되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풍요에 따른 여성의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 및 분업의 해체가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가 모든 아이를 양육한다든지. 
그렇다면 오히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것이 여성으로 하여금 집안에서 업무의 강도를 낮추었고, 그들에게 생식의 분업측면 측면에서는 더 큰 기회를 제공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면적으로 여성 시위가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경제발전을 했기 때문에 여권신장이 얻어진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관계는 엄격하게 논구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종합유추

1. 휴일을 맞이하여 긴 잠을 잤더니, 노트북을 두드리는 나의 손놀림이 현저하게 둔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또한 긴 잠을 자서 머릿속을 가득차고 있는 피곤함이 소실되니 뭔가 스트레스는 덜 받는데 뭘 하고 싶은 욕구는 크게 없다. 난 보통 글을 쓸 때 나의 내적 갈등에서의 고뇌에서 유발되는 표현욕구에서 기인하는 스트레스를 자주 이용하는 편인데, 내가 오래된 기독교도 중에 흔히 '방언이 터진다.'는 경험을 해본적이없기 때문에 이 비유를 사용하는게 적절한지는 알기 어려우나, 마치 방언을 하는것과 같이 쉴 새 없이 생각나는 것을 정리해 나가다보면 어느새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도달하게 된다.

사실상 표현되는 언어라는 것은 단순히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생각의 바다 위에 높여진 부표일 뿐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이 글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주장한다. 보통 규범적으로는 그 부표가 상대방의 부표와 상호비교에서 엄밀하게 사용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설령 내가 사과라고 말하는 것에서 조차 상대방이 사과라고 말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확신을 갖지 않는다.

난 타자에게 의식이 있음을 전제해도, 혹은 타자에게 의식이 없음을 전제해도 그 두가지 방향 모두에서 상대방과 나의 '용어'가 형식적으로라도 실질적으로라도 같게 보기 어렵다는 추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후자의 '타자에게 의식이 없음'을 전제로 한다면 이것은 내 사고상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전자의 '타자에게 의식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면 여기에서는 추가적인 '논증'이 제시되어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과거의 담벼락에 이미 적어놨던 것과 같은데, 나는 사과라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의 형성에 있어서 그 개념을 외부에 있는 '사과'라는 것을 엄밀하게 나에게 가져옴으로써 형성한것이기 보다는 그것에 대해서 감각적으로 지성적으로 개념들을 종합함으로써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감각적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대상들을 경유해서 얻어진 앎이라고 나는 말하며, 지성적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 형성한 나의 앎에 대해 끊임없이 연장되는 현재에 대해 추론적으로 연장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을 한다.

지성적 앎과 감각적 앎에 대해서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지성적 앎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끊임없는 연장과 체계성을 의미하며, '감각적 앎'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 그 자체의 '일시적인 앎'이라고나는 말한다. 전자의 '지성적 앎'은 판단으로써의 앎이며 후자의 감각적이라는 것은 경유하여 대응함의 앎이라고 나는 규정한다.

여기서의 지성적 앎과 감각적 앎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대한 감각이다. 과거 시간의식을 논할때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나는 T1, T2 분명 다른 '시점'에서 본 빨간색을 같은 빨간색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대상을 지칭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나에게 그 판단을 유발시키는 어떠한 판단의 준거가 주어져 있지 않다. 나는 빨간색이라고 대상들을 지칭하지만, 그것들이 엄밀하게 빨간색임을 검증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대상들을 같은 빨간색이라고 지칭을 한다. 그리고 또한 T1에서 주어진 빨간색과 T2에서 주어진 빨간색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비교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T1과 T2는 개념상 구성된 시간적인 '연장'에서 논하는 시간개념을 의미한다. 실재하는지도 모르는 실재계의 시간을 전제하여 시간의 부표를 그 위에 올린다고 하기 보다는, 의식의 흐름에서 추론된 순간을 의미하며, 여기서의 순간이라는 것은 매순간 경험하는 '현재'를 의미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 하지만 이 논증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제기 된다. 이 부분은 현준이 형이 제기한 문제랑 그 맥락을 같이 하는데, '만일 김효영이 말한 것과 같이, 순전히 나의 앎이라는 것이 대상으로부터 경유하여 주어진 것이라면 최초 사과를 목격하는 과정에서, 과연 사람은 T1과 T2에서 말해지는 '사과'라는 것에 대해 개념을 형성함에 있어서 어떻게 동일한 개념의 연장으로써 '추론적 앎'을 형성하느냐가 바로 그것이다. ( 쉽게 말하겠다. T1의 사과와 T2의 사과가 같은 사과임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으며, 그렇게 본다면 '사과'의 개념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대상들에 대해서 사과라는 개념 자체를 구조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안을 한다. 사과라는 것을 구성하는 '지성적 앎'에 대해서는 '감각적 앎'이 선행하여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나에게는 이미 감각적인 것에 대한 것은 주어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는데, 대상을 경유하여 그것을 인식할 때, 내가 보는 그것은 마치 검은 밑그림이 그려진 스케치북과 같다는 것이다. 나는 해당 '스케치북의 비유'가 꽤 큰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 어린아이들이 그리는 검은색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스케치북을 생각하라, 그 스케치북에 구획은 분명히 있다. 그 구획위에 보통 크레파스로 색칠을 하는데, 그 색칠은 감각적 앎이요, 그 구획과 감각적 앎이 결합된 것은 '지성적 앎'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그 공란에 크레파스로 색칠함에 있어서, 그 색의 동일성에 대한 '믿음'은 연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T1에서 관찰한 빨간색과 T2에서 관찰한 빨간색에 대해서 나는 같은 빨간색이라고 지칭하지만, 그 두색을 빨간색으로 지칭함에 있어서, 빨간색이 아님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개별 결합에 대해서 '의심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대상의 '지성적 앎'을 구성할 수가 있게 된다.(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은 명확하다. 최소한의 결합인 '감각적 앎'[대상을 경유하여 주어진 앎]에 대해서 조차 만일 '확신'을 갖지 않다면, 대상의 유사성 혹은 동일성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없으며 나는 대상을 '판단'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색에 대한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목격한 '사과'는 나에게 사과와 사과가 아닌것, 그리고 사과와 다른 사과를 구분할 수 조차 없게 만들것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내 안의 동일성조차 구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타자의 '의식'을 전제해보았자, 의식의 전제에서 어떠한 것도 '의미있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은 첫번째 근거로 제시될만하다고 본다.

다음 논거는 앞의 '지성적 앎'과 같은 측면에서 형성이 되는데, 앞에서 말했다시피 '감각적 앎'은 '지성적 앎'에 대해서 선행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감각적 앎이라는 것이 만일 '대상을 경유해서 얻어진 앎'이라고 한다면(대상을 경유해서 얻어진 앎이라는 것은 나에게 주어져있는 것을 대상과 대응시킴으로써 대상을 인식한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이는 나에게 있는 것으로써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지, 감각 너머의 세계를 보는 것은 아님은 분명하다. (설령 감각 너머의 세계를 본다고 해도 이것은 그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다.[여기서 의미라 함은 대상에 관계하는 명확한 나의 '앎'을 말한다.]) 따라서 설령 상대의 의식이 실재한다고 해서, 그 실재함에 대한 전제가 어떠한 '의미있는' 결과물을 제기해줄 수 없으며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의미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의미 없는' 것이기에, 타자의 '감각되지 않는 의식'을 감각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기에 배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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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휴일을 맞이하여 긴 잠을 잤더니, 노트북을 두드리는 나의 손놀림이 현저하게 둔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또한 긴 잠을 자서 머릿속을 가득차고 있는 피곤함이 소실되니 뭔가 스트레스는 덜 받는데 뭘 하고 싶은 욕구는 크게 없다. 난 보통 글을 쓸 때 나의 내적 갈등에서의 고뇌에서 유발되는 표현욕구에서 기인하는 스트레스를 자주 이용하는 편인데, 내가 오래된 기독교도 중에 흔히 '방언이 터진다.'는 경험을 해본적이없기 때문에 이 비유를 사용하는게 적절한지는 알기 어려우나, 마치 방언을 하는것과 같이 쉴 새 없이 생각나는 것을 정리해 나가다보면 어느새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도달하게 된다.

사실상 표현되는 언어라는 것은 단순히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생각의 바다 위에 높여진 부표일 뿐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이 글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주장한다. 보통 규범적으로는 그 부표가 상대방의 부표와 상호비교에서 엄밀하게 사용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설령 내가 사과라고 말하는 것에서 조차 상대방이 사과라고 말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확신을 갖지 않는다.

난 타자에게 의식이 있음을 전제해도, 혹은 타자에게 의식이 없음을 전제해도 그 두가지 방향 모두에서 상대방과 나의 '용어'가 형식적으로라도 실질적으로라도 같게 보기 어렵다는 추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후자의 '타자에게 의식이 없음'을 전제로 한다면 이것은 내 사고상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전자의 '타자에게 의식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면 여기에서는 추가적인 '논증'이 제시되어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과거의 담벼락에 이미 적어놨던 것과 같은데, 나는 사과라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의 형성에 있어서 그 개념을 외부에 있는 '사과'라는 것을 엄밀하게 나에게 가져옴으로써 형성한것이기 보다는 그것에 대해서 감각적으로 지성적으로 개념들을 종합함으로써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감각적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대상들을 경유해서 얻어진 앎이라고 나는 말하며, 지성적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 형성한 나의 앎에 대해 끊임없이 연장되는 현재에 대해 추론적으로 연장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을 한다.

지성적 앎과 감각적 앎에 대해서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지성적 앎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끊임없는 연장과 체계성을 의미하며, '감각적 앎'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 그 자체의 '일시적인 앎'이라고나는 말한다. 전자의 '지성적 앎'은 판단으로써의 앎이며 후자의 감각적이라는 것은 경유하여 대응함의 앎이라고 나는 규정한다.

여기서의 지성적 앎과 감각적 앎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대한 감각이다. 과거 시간의식을 논할때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나는 T1, T2 분명 다른 '시점'에서 본 빨간색을 같은 빨간색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대상을 지칭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나에게 그 판단을 유발시키는 어떠한 판단의 준거가 주어져 있지 않다. 나는 빨간색이라고 대상들을 지칭하지만, 그것들이 엄밀하게 빨간색임을 검증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대상들을 같은 빨간색이라고 지칭을 한다. 그리고 또한 T1에서 주어진 빨간색과 T2에서 주어진 빨간색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비교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T1과 T2는 개념상 구성된 시간적인 '연장'에서 논하는 시간개념을 의미한다. 실재하는지도 모르는 실재계의 시간을 전제하여 시간의 부표를 그 위에 올린다고 하기 보다는, 의식의 흐름에서 추론된 순간을 의미하며, 여기서의 순간이라는 것은 매순간 경험하는 '현재'를 의미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 하지만 이 논증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제기 된다. 이 부분은 현준이 형이 제기한 문제랑 그 맥락을 같이 하는데, '만일 김효영이 말한 것과 같이, 순전히 나의 앎이라는 것이 대상으로부터 경유하여 주어진 것이라면 최초 사과를 목격하는 과정에서, 과연 사람은 T1과 T2에서 말해지는 '사과'라는 것에 대해 개념을 형성함에 있어서 어떻게 동일한 개념의 연장으로써 '추론적 앎'을 형성하느냐가 바로 그것이다. ( 쉽게 말하겠다. T1의 사과와 T2의 사과가 같은 사과임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으며, 그렇게 본다면 '사과'의 개념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대상들에 대해서 사과라는 개념 자체를 구조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안을 한다. 사과라는 것을 구성하는 '지성적 앎'에 대해서는 '감각적 앎'이 선행하여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나에게는 이미 감각적인 것에 대한 것은 주어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는데, 대상을 경유하여 그것을 인식할 때, 내가 보는 그것은 마치 검은 밑그림이 그려진 스케치북과 같다는 것이다. 나는 해당 '스케치북의 비유'가 꽤 큰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 어린아이들이 그리는 검은색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스케치북을 생각하라, 그 스케치북에 구획은 분명히 있다. 그 구획위에 보통 크레파스로 색칠을 하는데, 그 색칠은 감각적 앎이요, 그 구획과 감각적 앎이 결합된 것은 '지성적 앎'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그 공란에 크레파스로 색칠함에 있어서, 그 색의 동일성에 대한 '믿음'은 연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T1에서 관찰한 빨간색과 T2에서 관찰한 빨간색에 대해서 나는 같은 빨간색이라고 지칭하지만, 그 두색을 빨간색으로 지칭함에 있어서, 빨간색이 아님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개별 결합에 대해서 '의심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대상의 '지성적 앎'을 구성할 수가 있게 된다.(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은 명확하다. 최소한의 결합인 '감각적 앎'[대상을 경유하여 주어진 앎]에 대해서 조차 만일 '확신'을 갖지 않다면, 대상의 유사성 혹은 동일성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없으며 나는 대상을 '판단'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색에 대한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목격한 '사과'는 나에게 사과와 사과가 아닌것, 그리고 사과와 다른 사과를 구분할 수 조차 없게 만들것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내 안의 동일성조차 구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타자의 '의식'을 전제해보았자, 의식의 전제에서 어떠한 것도 '의미있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은 첫번째 근거로 제시될만하다고 본다.

다음 논거는 앞의 '지성적 앎'과 같은 측면에서 형성이 되는데, 앞에서 말했다시피 '감각적 앎'은 '지성적 앎'에 대해서 선행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감각적 앎이라는 것이 만일 '대상을 경유해서 얻어진 앎'이라고 한다면(대상을 경유해서 얻어진 앎이라는 것은 나에게 주어져있는 것을 대상과 대응시킴으로써 대상을 인식한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이는 나에게 있는 것으로써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지, 감각 너머의 세계를 보는 것은 아님은 분명하다. (설령 감각 너머의 세계를 본다고 해도 이것은 그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다.[여기서 의미라 함은 대상에 관계하는 명확한 나의 '앎'을 말한다.]) 따라서 설령 상대의 의식이 실재한다고 해서, 그 실재함에 대한 전제가 어떠한 '의미있는' 결과물을 제기해줄 수 없으며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의미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의미 없는' 것이기에, 타자의 '감각되지 않는 의식'을 감각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기에 배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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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휴일을 맞이하여 긴 잠을 잤더니, 노트북을 두드리는 나의 손놀림이 현저하게 둔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또한 긴 잠을 자서 머릿속을 가득차고 있는 피곤함이 소실되니 뭔가 스트레스는 덜 받는데 뭘 하고 싶은 욕구는 크게 없다. 난 보통 글을 쓸 때 나의 내적 갈등에서의 고뇌에서 유발되는 표현욕구에서 기인하는 스트레스를 자주 이용하는 편인데, 내가 오래된 기독교도 중에 흔히 '방언이 터진다.'는 경험을 해본적이없기 때문에 이 비유를 사용하는게 적절한지는 알기 어려우나, 마치 방언을 하는것과 같이 쉴 새 없이 생각나는 것을 정리해 나가다보면 어느새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도달하게 된다.

사실상 표현되는 언어라는 것은 단순히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생각의 바다 위에 높여진 부표일 뿐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이 글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주장한다. 보통 규범적으로는 그 부표가 상대방의 부표와 상호비교에서 엄밀하게 사용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설령 내가 사과라고 말하는 것에서 조차 상대방이 사과라고 말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확신을 갖지 않는다.

난 타자에게 의식이 있음을 전제해도, 혹은 타자에게 의식이 없음을 전제해도 그 두가지 방향 모두에서 상대방과 나의 '용어'가 형식적으로라도 실질적으로라도 같게 보기 어렵다는 추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후자의 '타자에게 의식이 없음'을 전제로 한다면 이것은 내 사고상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전자의 '타자에게 의식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면 여기에서는 추가적인 '논증'이 제시되어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과거의 담벼락에 이미 적어놨던 것과 같은데, 나는 사과라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의 형성에 있어서 그 개념을 외부에 있는 '사과'라는 것을 엄밀하게 나에게 가져옴으로써 형성한것이기 보다는 그것에 대해서 감각적으로 지성적으로 개념들을 종합함으로써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감각적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대상들을 경유해서 얻어진 앎이라고 나는 말하며, 지성적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 형성한 나의 앎에 대해 끊임없이 연장되는 현재에 대해 추론적으로 연장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을 한다.

지성적 앎과 감각적 앎에 대해서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지성적 앎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끊임없는 연장과 체계성을 의미하며, '감각적 앎'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 그 자체의 '일시적인 앎'이라고나는 말한다. 전자의 '지성적 앎'은 판단으로써의 앎이며 후자의 감각적이라는 것은 경유하여 대응함의 앎이라고 나는 규정한다.

여기서의 지성적 앎과 감각적 앎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대한 감각이다. 과거 시간의식을 논할때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나는 T1, T2 분명 다른 '시점'에서 본 빨간색을 같은 빨간색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대상을 지칭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나에게 그 판단을 유발시키는 어떠한 판단의 준거가 주어져 있지 않다. 나는 빨간색이라고 대상들을 지칭하지만, 그것들이 엄밀하게 빨간색임을 검증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대상들을 같은 빨간색이라고 지칭을 한다. 그리고 또한 T1에서 주어진 빨간색과 T2에서 주어진 빨간색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비교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T1과 T2는 개념상 구성된 시간적인 '연장'에서 논하는 시간개념을 의미한다. 실재하는지도 모르는 실재계의 시간을 전제하여 시간의 부표를 그 위에 올린다고 하기 보다는, 의식의 흐름에서 추론된 순간을 의미하며, 여기서의 순간이라는 것은 매순간 경험하는 '현재'를 의미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 하지만 이 논증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제기 된다. 이 부분은 현준이 형이 제기한 문제랑 그 맥락을 같이 하는데, '만일 김효영이 말한 것과 같이, 순전히 나의 앎이라는 것이 대상으로부터 경유하여 주어진 것이라면 최초 사과를 목격하는 과정에서, 과연 사람은 T1과 T2에서 말해지는 '사과'라는 것에 대해 개념을 형성함에 있어서 어떻게 동일한 개념의 연장으로써 '추론적 앎'을 형성하느냐가 바로 그것이다. ( 쉽게 말하겠다. T1의 사과와 T2의 사과가 같은 사과임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으며, 그렇게 본다면 '사과'의 개념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대상들에 대해서 사과라는 개념 자체를 구조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안을 한다. 사과라는 것을 구성하는 '지성적 앎'에 대해서는 '감각적 앎'이 선행하여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나에게는 이미 감각적인 것에 대한 것은 주어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는데, 대상을 경유하여 그것을 인식할 때, 내가 보는 그것은 마치 검은 밑그림이 그려진 스케치북과 같다는 것이다. 나는 해당 '스케치북의 비유'가 꽤 큰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 어린아이들이 그리는 검은색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스케치북을 생각하라, 그 스케치북에 구획은 분명히 있다. 그 구획위에 보통 크레파스로 색칠을 하는데, 그 색칠은 감각적 앎이요, 그 구획과 감각적 앎이 결합된 것은 '지성적 앎'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그 공란에 크레파스로 색칠함에 있어서, 그 색의 동일성에 대한 '믿음'은 연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T1에서 관찰한 빨간색과 T2에서 관찰한 빨간색에 대해서 나는 같은 빨간색이라고 지칭하지만, 그 두색을 빨간색으로 지칭함에 있어서, 빨간색이 아님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개별 결합에 대해서 '의심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대상의 '지성적 앎'을 구성할 수가 있게 된다.(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은 명확하다. 최소한의 결합인 '감각적 앎'[대상을 경유하여 주어진 앎]에 대해서 조차 만일 '확신'을 갖지 않다면, 대상의 유사성 혹은 동일성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없으며 나는 대상을 '판단'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색에 대한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목격한 '사과'는 나에게 사과와 사과가 아닌것, 그리고 사과와 다른 사과를 구분할 수 조차 없게 만들것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내 안의 동일성조차 구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타자의 '의식'을 전제해보았자, 의식의 전제에서 어떠한 것도 '의미있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은 첫번째 근거로 제시될만하다고 본다.

다음 논거는 앞의 '지성적 앎'과 같은 측면에서 형성이 되는데, 앞에서 말했다시피 '감각적 앎'은 '지성적 앎'에 대해서 선행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감각적 앎이라는 것이 만일 '대상을 경유해서 얻어진 앎'이라고 한다면(대상을 경유해서 얻어진 앎이라는 것은 나에게 주어져있는 것을 대상과 대응시킴으로써 대상을 인식한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이는 나에게 있는 것으로써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지, 감각 너머의 세계를 보는 것은 아님은 분명하다. (설령 감각 너머의 세계를 본다고 해도 이것은 그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다.[여기서 의미라 함은 대상에 관계하는 명확한 나의 '앎'을 말한다.]) 따라서 설령 상대의 의식이 실재한다고 해서, 그 실재함에 대한 전제가 어떠한 '의미있는' 결과물을 제기해줄 수 없으며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의미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의미 없는' 것이기에, 타자의 '감각되지 않는 의식'을 감각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기에 배제한다.

 

Posted by 종합유추

3-1.

2번과 3번은 별개의 문제이다. 2번 문제에 비해서 3번의 문제를 먼저 다루는 것을 요청하시는 분이 몇분 계셔서 2에 앞서서 3을 먼저 다루기로 한다. 3에서 다룰 이야기는 1의 논의를 전제로 한다. 3에서 다룰 문제는 '나와 타자'를 다루는 '관계의 문제'라고 일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사회적 규범과 법 그리고 개인에 대한 논의와 그 맥을 같이한다. 만일 세계가 문제 1에서 기술되었던 바와 같이, '감각적 앎'에서 추론된 '지성적 앎'으로 나아간다고 한다면, 약간의 '비약'이 있다고 생각하나, 세계는 나의 경험의 확장이고, 세계가 만일 나의 경험의 확장이라고 한다면, 그 경험속에 주어진 대상들과의 관계들에 있어서 내가 어떠한 '행위'를 하던들 그것은 실제로는 나의 경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들에 대해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관계를 고려하여 행동하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안의 관계들만을 다루는 것이 됨으로 실질적으로 대상과의 관계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의미를 상실한다.

->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겪는다. 그것은 내가 양심이라고 부르는 문제인데, 만일 야생의 상태에 순전히 내가 놓여져 있다면, 나에게 어떠한 욕구가 있고 그것을 해소하고자 하는 방법을 안다면, 그것에 대해서 타자의 시선과 관계 없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경우를 볼 수 있다. 좀 극단적인 경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만일 현재 순간에 흔히 통칭되는 개념적인 '인간'을 살해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있을 때 내 손에 칼이 쥐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인'행위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만일 야생의 상태에 놓여 있고 상대방을 인간으로 간주할만한 어떠한 근거지을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면 나는 잔혹하게 상대에 대해서 살인행위를 자행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사회 내에 포함되어 있고 내가 나무를 인간으로 간주하고 있을 경우 나는 나무를 베는 행위를 마치 '살인 행위'와 같은 것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 이 문제는 나는 개고기에 대한 사회적 문제에서 등장하는 관점과 비슷하게 생각하는데, 규범은 상대 인간을 존중하라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인간'에 대한 범주의 확정은 어렵다. 개별적 인간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사용한 개별자들에게 내적으로 완결하게 주어져 있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같지 않다. 그것은 전제 1과 같은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앞의 '나무'의 예시에서와 같이, 개를 친구이자 인간으로 취급하는, 일종의 개라고 지칭되는 실재물을 인간이라고 불러지는 개념 하에 둔다면, 개를 잡아먹는 행위는 그들에게 살인하는 행위와 진배없으며 그들 나름의 '규범성'에서는 지양되어야 할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들의 행동은 개별적으로 일관적이나, 타자에게서는 일관적이기 어렵다. ( 그들은 규범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서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하나, 그렇게 결정한 스스로의 행동은 '규범성'에서 차이를 발생시킨다. 서로 믿고 있는 '인권'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는 점은 이것을 지칭한다. 너가 생각하는 용맹함과 내가 생각하는 용맹함이 같은지 알 수 없고, 결국 따져봄의 문제가 발생하며, 언어는 명분이오 실질은 '통제가능한 대상'에서 발생함에 대한 권력적인 행동에 대한 논의가 이와 연결된다. 과거에 언급한바 있듯이, 내가 타자를 통제하는 방법은 말로써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있고, 힘으로 상대방을 누르는 것이 있고, 혹은 정신적으로 감명깊게 만드는 방식이 있다. 각 방법 모두 상대를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공통적으로 사용되며, 여기서의 규범성에 대한 문제는 힘으로 상대방을 누르는 것과 '설득'과 연결된다.)

-> 다음과 같은 경우를 가정할 수 있다. 내가 만일 어떠한 교육도 받지 않았다면, 나는 사회에 포함되었다고 하더라도 나의 행동에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다. 정말로 그럴 것 같고, 자유거래를 보장해주지 않는 국가 내에서 내가 만일 그 국가의 '규범'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다면 나는 타인을 관찰함에 있어서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집단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나는 거리낌 없이 행동할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게 만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어떻게 이와 같은 판단을 얻게 되었는가? 이것은 타인에 의해서 주어진 것은 분명히 아니다. 타인에 의해서 해당 지식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필히 간접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직접적으로 주어질 수 없을 것이다.(왜냐하면 그것은 경유한 앎을 형성할 수 없을테니까, 유일하게 경유할 수 있는 것은 해당 언화행위에 대한 나의 개념적 대응에서만 가능할터인데, 말로 전해지는 지식은 말의 형식에 대한 경유한 앎을 갖는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말과 대응되는 의미의 논리적 관계에 대한 지성적 통찰을 갖지 못한다면, 이를 지각하기는 어려운 문제이다.[나는 이 부분에서 백문이불여일견을 해석한다.{여기서 봄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감각함을 의미한다.}] 말은 떠올리게 할 수 있어도, 실질적으로 개념을 알려주지 못한다. '사과'에 대한 개념을 모르는 사람에게 사과를 말해준다고 하던들 그 사람은 사과에 대해서 알지 못함은 분명할 것이며, 사과의 달콤함에 대해서 설명한다고 하던들 사과를 직접 먹어보지 않고는 사과의 달콤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것이다. )

그렇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감각적' '지성적' '반성적(2부에서 등장할 개념인데 설명하지 않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내가 가지고 있는 판단들에 대해서 재관찰(재인상이라는 말도 사용한다.)과 같은 것이며, 과거의 것을 경유한 앎을 의미한다. 여기서 과거의 것을 경유한 앎이라는 것은 대상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으로 도달해야 할 것이다. (없음 -> 감각적 앎 -> 지성적 앎 -> [반성적 앎, 감각적 앎] -> 지성적 앎 .. to inf) 그렇다면 그것은 필히 '경험적'어야아 한다.

엄밀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을 너무 성급하게 결론 내리는 감이 있는데, 나는 경험적으로 왜 해야함을 습득한다. 나의 판단은 과거의 경험의 재인상과 현재의 '감각적 앎'과 그에서 비롯한 종합적 '지성적 앎'(추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판단의 근거로써 주어진 과거의 '경험'이라는 것 혹은 지성적인 앎이라는 것은 그 다음 판단의 근거로써 재인상됨에 따라서 행동의 경향성을 가져온다. 그것은 '일관적'이지 않지만 '일관적'으로 보이는 감각적인 앎의 속성과 매우 유사하다. 나는 '태어남'으로써 사회와 계약을 맺지 않았지만, 사회에서 '살아감'으로써 사회와 계약을 맺는다. (사람들이 인권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결국 사회에 포함된 개인으로써 가지고 있는 사회와의 계약적 근거로써의 양심에 대한 충분한 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양심이 만들어낸 당위가 그들의 행동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것은 규범성의 효력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 무경험적인 상태에서 경험한 이후에 행해진 판단의 근거는 경험으로 부터 기원한다. 집단 내에서 경험한 사람이 처음부터 자신이 집단과 계약 선택할 자유는 있었다고 생각하나, 사실 이것은 집단 내에서의 경험 이후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단내에서의 포함됨으로써 획득된 지식으로부터 추론된 '계약'에 대한 앎이 과거로 소급하여 계약이 불공정 계약임을 주장할만한 정당한 근거가 되는가 한다면 이는 어려워보인다.

나는 사회라는 것은 결국 규범성의 형식적 토대를 위한 '보자기'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형식일 뿐, 사실은 개별의 의지와 그 의지에 대한 Some x인 규범에 대한 의지의 결합이다. 그 양심을 다룸으로써 강력한 통제력을 획득한다. 그것은 의식적으로든 가시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비가시적으로든 나타난다. 3-2 파트의 사랑함에 대한 예시는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할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종합유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