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기 프랑스 한 시골 마을 소란한 장터 한가운데 누더기 옷을 입은 사내가 등장했다. 신의 은총을 비는 아낙과 농부들이 사내 주위를 감싸는 가운데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사의 음성을 전하노라, 성지를 되찾아라.” 십자군 전쟁의 서막을 연 은자 피에르 신부였다.

처음 피에르는 가는 곳마다 반미치광이로 취급됐다. 고위 신부들과 귀족들은 피에르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갑자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예루살렘을 공격하라니. 우연한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피에르는 결코 역사 속에 기억되지 않았으리라. 때마침 날아온 비잔틴 황제로부터의 구원 요청과 이를 이용하려했던 로마 교황이 ‘성전’을 촉구한 순간 은자 피에르는 선각자로 추앙받았다.

피에르가 선동한 이른바 ‘민중십자군’은 십자군 전쟁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동시에 종교적 광기와 아집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피에르가 주장한 ‘신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농부, 직공, 군인들이 재산을... 팔아 그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나아갔다. 신념은 충만했지만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냉혹한 현실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단지 막연히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시작한 행군은 굶주림과 죽음을 불렀다. 신을 따른다던 그들이 곳곳에 자행한 일은 약탈과 살인 등 범죄 행위였다.

민중십자군의 가장 큰 문제는 주동자 피에르 신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종교적 신념이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사람들을 모으고 선동했던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신부로서의 역할에 머무를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군사와 정치 지도자로서 안쓰러울 정도로 무지했다. 그는 수도원 안에서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평안을 주는 사람이었는지는 모른다. 수도원 바깥에서 그가 사람들에게 남긴 유산은 광기와 상처뿐이었다. 민중십자군은 성지에는 가보지도 못한 채 어이없이 전멸하고 말았다.

10세기 가까이 지난 상황에서 나는 이것과 유사한 상황을 본다. 이해할 수 없지만, 어찌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저 그들이 원하던 혹은 원하지 않던 어떤 결말에 도달할지를 기대할 뿐이다.

 

Posted by 종합유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