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새 선거를 보면 이것은 마치 운동 경기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감추기 어렵다. 새누리당 골수팬님들과 새정치 골수팬님들의 싸움은 마치, 성난 야구 관중들의 싸움과 흡사하다. 선거판이 스포츠 게임 같이 변했으니 그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좋은 선수로써의 자질'을 갖춰가는 것 같기도 하다.

적합한지 아니면 적합하지 않은 문제인지를 '따져야 함'이 필요한 과정에서 그럴 이유도 없이 그냥 변호를 위한 변호를 하고, 반박을 위한 반박을 하는듯한 인상. 매우 감정적이고 충분한 '설명'이 동반되지 않는 것은 거참 보기 부담스럽소.

2. 실재계를 가정한 상황에서 대중의 의사는 일종의 규범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규범은 약한 개인들이 서로 계약을 맺음으로써 자신의 일부 '의사'를 양도한 추상적인 힘의 실체라고 나는 보통 말을 한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사회는 성문화되었든 성문화되지 않았든 그 이전에 그들 내부의 규범에 의해서 자생적으로 어떤 ...특정 규칙이나 규범등을 만든다. 이것을 보통 문화나 관습이라고 사람들은 지칭한다.

이런 문화와 관습을 어떤 사람은 어떠한 실체도 갖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이 문제의 핵심을 보지 못하고 그 피상만을 본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각 개인들은, 그 경험이 대상과 일치하든 일치하지 않든간에, 자극과 반응에서 경험을 습득하고 그에 맞춰서 행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 문화와 관습의 예외를 생각하기 전까지는 해당 규범에 대해서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믿으며, 거부없이 그것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 같다.

간단한 일례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은 규범적인 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개인에게서 찾는다면 딱히 찾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누군가는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타인이 있음으로써 나는 상호호혜에 입각하여 장기적인 효용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비효율적임으로 나는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가 바로 그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정당하지 못한데, 나는 그 이유를 상호호혜성 자체가 관계를 통해서 구조한 당위이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을 고려하기 위한 과정에서 선행해야 하는 관계는 나와 타자의 관계의 상황에서 타자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그렇다면 그 근거는 자의적이기 보다는 타의적에 가깝다. 이것은 당위성을 담보하지만 그 당위성에 대한 근거에서 타자에 대한 이해라던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전제가 선행해서 제시되어야 하기 때문에, 엄밀한 근거를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그런고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명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따름을 강요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많은 비약이 있고 많은 설명이 덧붙여져야 함은 분명하지만, 나는 이런 방법으로 문화나 관습 혹은 규범은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것의 실체가 감각적으로는 지각될 수 없는 것이지만, 지성적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써 개인의 행동을 강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위협은 보이지 않는 거인으로써 개인을 억누르는 관계에 있다.

같은 이유에서 나는 대중적이라는 것은 가장 원시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중적인 차원의 '행동' 다시 말해 그 국민성이라는 것은 마치 거대한 스파게티 괴물이 보이지 않는 면빨의 촉수로 나의 머리를 관통하여 나의 행동의 일부를 지배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 괴물은 개인들로부터 힘을 공급받으며 그 개인들은 그 힘의 대리자가 된다.

이 규범은 정신력이 강한 인간들을 고문하여 자신의 휘하에 두는 트라우마 같은 것을 개인들에게 심어주는 경향이 있는것 같다. 자신의 의지가 강한 사람들은 보통 이런 스파게티 면빨로 부터 도망을 치려고 하는데, 그런 경우 그 스파게티 괴물의 대리자들이 그를 구속하여 그들로 하여금 스파게티 괴물에게 타의에 의해서 복속하게 만드는 것 같다.

결론 : 규범은 거대한 스파게티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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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음과 같은 두 문장을 자주 듣는데, 하나는 내가 자주 말하는 문장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자주 듣는 문장이다.

그 문장의 대체적인 형식은 다음과 같다.

A : '사실관계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섣불리 단정하지 마라.'...

B : '사실 관계를 아는게 뭔 상관이냐? 오히려 너가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의 문장이다.

보통 나는 앞의 문장을 자주 말하고, 후자의 반박을 자주 듣는편이라고 말할 수 있고, 내가 앞의 문장을 말했을 때 대부분의 경우에 따라 오는 후자의 문장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채 던져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런 문제는 대체적으로 '민감한 윤리적 문제들'에 관련된 것이고, '당연히 ~해야 한다.'는 문제들에서 보통 이런 문제들이 발생한다.

내가 하는 A 문장의 대체적인 핵심 의도는 '아무리 봐도 그것은 설명이 안 되니 나도 모르겠다.'이고 그 설명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 이 경우에는, '그것이 순전히 당신의 생각에서만으로 한정짓는 것이 아닌데다가 현상의 설명에 대한 유예한 합의라는 최소한의 과정도 거치지 않았는데, 그것을 따져봄이 필요없이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거만하고 오만해 보인다.'는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뒤의 문장 '사실 관계를 아는게 뭔 상관이냐? 오히려 너가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의 문장은 전적으로 논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간단한 대화를 제시해보자.

A : 모든 사람의 인권은 지켜져야 돼, 평등의 문제도 같이 다뤄져야만 하고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기회와 자신의 선택에 있어서 자유의 문제에 대해서 침해 받으면 안 돼.

김효영 : 글쎄, 그게 비록 규범적이긴 하지만 사실 항상 너나 나는 '선택'에 문제에 직면해 있고 유년기의 사람들 중 나는 누군가는 자신의 더 나은 선택을 위해 선택하는 경우를 보지만 누군가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 경우를 자주봐, 그렇다면 누군가가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얻은 선택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권리를 인정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며, 희생하지 않고 그저 그런 선택을 했던 사람들의 선택에 대해서 그 사람들은 책임져야 하는 것이 있는것 아닐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니?

정당한 고민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정당한 고민을 거치지 않은 책임을 물어야 함이 분명할 것 같은데? 나는 대가라는 것은 그에 적합한 사람이 차지해야 한다고 본다.

이 경우의 반응은 크게 두가지

1 : 그건 너가 사실을 잘 몰라서 그런거야 그것은 그들의 책임이기 보다는 그들의 행동을 유발시킨 사회의 제도상의 문제에 책임이 있는거야

2 : 너 참 못됐구나?

그럼 보통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1의 경우에는 '사실관계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섣불리 생각하지 마라.'라고 말을 하고, 2의 경우에는 '후;; 말을 말자' 라고 말을 하는 편.

만일 A의 맨 처음 발화가 '이런 논리에서는 이런 결과가 나타는게 정당하다고 생각해'라고 했다면 '어 그것은 가능성이 있지, 틀린 설명은 아니야.'라고 말을 하겠지만, '이것은 현실에서도 정당해'라고 말을 하면 이런 문제가 보통 나타나는 것 같아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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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학과 친구들에게는 광역 어그로가 될 수는 있는데, 나는 다음의 4가지로 해석의 층위를 구별한다.

1. 현재 자신의 의식에 대한 해석
2. 자연과학적(논리)적 해석
3. 경험을 통한 현실에 대한 해석...
4. 역사적 해석

1에서 4로 갈수록 그 fancy성이 강해진다고 나는 보통 보는데, 기록이나 유물을 통한 이해는 기록이나 유물에 대한 이해라고는 볼 수 있겠지만 그 기록이나 유물이 있었다고 '추정된 시기'에 대한 엄밀한 이해를 동반하기는 어렵다고 나는 생각함. 이것은 현준이 형하고도 이야기 했었던 문제고 보람이 형하고 이야기 했던 문제인데, 역사에 대한 문제는 사실 '실증'에 대한 믿음은 가능하지만 실증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까깝다고 볼 수 있다고 봄.

예를 들어 현재 화석으로 발견되는 공룡 뼈들의 모양으로 공룡에 살을 붙여 공룡의 모습을 추정하고 공학적으로 추정한 지질연대 분석을 통하여 그 당시의 생활 환경을 추정하는 정도로 '그 당시에는 이럴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상황을 경험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함.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시간 여행'이 가능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시간 여행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 한계에 대해서도 설명이 되어야 하고 인식의 동일성에 대해서도 설명이 되어야 할 테니까. 결국 사료에 의한 'Fantasy'의 문제로 밖에 이어질 수 없음. 과거의 모든 사실 중에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실들은 필연적으로 상상의 과정이 동반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경험보다 더욱 엄밀하지 못하고, 흔히 '간접적 접근'이라고 말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봄.

대체적으로 나는 크게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도 구분하고, 간접 경험이나 직접 경험도 시간 흐름에 따른 흐릿함과 희미해짐에 따라서 그 해석의 농도를 구분하는데, 예를 들어 현준이 형이 '김효영이 어제 밥을 먹었어'라고 김효영이 아닌 A에게 진술했다고 했을 때, 이 사실에 대해서 현준이 형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한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그 진술에 해당하는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을 것이라고 믿고 그 가능성은 꽤 높다고 볼 수 있음. 하지만 '100년전에 사람 B가 죽었어'라고 말했을 때는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방식은 공학적 방식이거나, 혹은 유물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인데. 그것도 건너 건너 하는 방식이라서 그것에 대한 '확신'을 받는것도 사실은 쉽지 않음.

또 직접적 경험에 대한 경우에도 '나는 지금 타이핑을 하고 있다.'의 진술과 '나는 어제 타이핑을 하고 있다.'의 진술이 가리키는 경험의 대상은 '어제 타이핑을 하고 있음'에 대한 회상이 더불어 발생해야 함으로 이것도 해석의 문제로 빠지게 됨. 그리고 그 정확성은 지금 진술하는 것에 비해서 그 해석의 농도는 더 짙어질 수 밖에 없음.

그런 고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이미 지금 문제보다 매우 '높은 '해석의 농도'를 가질 수 밖에 없음. 그 과정에서 대상에 대해서 온전하게 어떠한 경향성이나 관계를 꺼내올 수 있다는 것은, 그것들을 가지고 하는 논리적 게임의 결론일 뿐이지 '실제로 그럴 것이다.'라고 할 수는 없는 것. 뭐 이런 논리대로라면, 사학쪽은 나쁘게 말하면 과거에 발생한 사실이 온전히 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근거 없이 사학자들 나름대로 해석한 담론들만 뿌려대거나 아니면 어떤 추상적인 담론을 추앙하는 광신도라고 말할 수 있겠고, 좋게 말하자면 현실을 해석하기 위한 유의미한 해석들을 자신의 나름대로 구성하는 사람들? 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봄.

그래서 나는 유물론에 대한 해석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자신이라는 한계(limit)'에서는 의미 있다고 보지만 그걸 넘어서서 '진짜 그러해'라고 말하면 이거 참 난감한 일.

 

Posted by 종합유추

오늘 생각하기를 나는 오히려 '비규범적'인 인간이 좀 더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항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자로, 스스로 매순간 자신의 경험과 사유을 통하여 선택하는 사람이라고 보인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한계적으로 합리적'일 수 밖에 없어 보인다. 나는 그런 상황을 평상에서 발견하는데, 그런 상황이라 함은, 자신의 행동이 미래에 끼칠 수 있는 예상되는 불효익을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되는 '선택'을 한다는 상황으로, 어쩔 수 없게 선택을 강요당하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뭐 쉽게 이야기 하자면 2번과 3번의 답에서 갈등하여 2번과 3번 둘중 하나가 답인데 둘 중 어떤 하나를 선택하면 분명히 틀릴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번이나 3번을 선택하고 충분한 정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찍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한다. 2번과 3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2번과 3번 중 하나가 '답'임을 안다면 고민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 대해서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미리 그 답을 알고 있기를 바라며, 그것에 대해서 굳이 고민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래 설령 컨닝을 해서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저 그것을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그 사람은 그 과정에서 어떠한 고민도 가지지 않을 것이며, 그 상황에서 어떠한 갈등도 겪지 않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것을 '선택'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어떠한 고민도 없고, 어떠한 불편함도 없다. 그저 '선택'을 하면 된다.

하지만 그것은 과연 생각하는 주체로써의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만한 것으로 보인다. 동물들을 관찰하면 동물들은 많은 순간 '직관적'인 판단을 내린다. 자연상태에 그대로 내버려둔 동물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내에서는 그들은 원하는 행동을 하려고 하며, 그 가운데 그 결과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의도대로 이루어짐과 다른 하나는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인 것으로 보인다. 설령 동물이 과거에 어떤 '반복 경험'을 통하여 특정한 행동에 대해서 고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근거는 통증이나 과거에 어떤 특정한 반발에 대한 상기일 뿐 '고차원적인 판단의 과정'이라고 말하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매우 직관적이고, 자신의 1차원적 욕구에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물론 실재할 가능성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을 것 같으나 매우 규범적이고 사회적인 인간 하나를 생각해보자. 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항상 모든것은 그 규범대로 이루어져야 함을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행함'으로 그저 만족을 느끼고, 그것이 성취되지 않으면 성취되지 않음에 대해서 불만을 느낄 뿐 그 '규범'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성도 갖지 않는다. 그저 그 법칙에 스스로를 종속시킬 뿐이다. 아무리 봐도 이것은 앞의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스스로 판단은 하는것 같으나 그것은 고뇌의 작용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너무 저차원적인 '순응'의 과정을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게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것은 매순간 현실이라는 문제 직면한 '인간'과 같지 않은 것 같다. 생각하는 것 같지 않으며, 마치 사회라는 거대한 유기체 속에 포함된 하나의 '세포'나 혹은 '장기'와 같은 기능을 하는 정도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러한 '규범적인 인간'을 그다지 '인간같다'라고 불러주는 것은 규범적인 것인 것 같으며, 인간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규범의 속성이 무엇이고, 합의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고민한 이후에 '규범'과 '합의'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그나마 인간적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규범이나 합의의 속성에 대해서 쥐뿔만큼도 생각해본적 없고, 그저 통상적인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배운자는 오히려 '비인간적'인 것 같다.

Posted by 종합유추

남에게 자신의 의미를 쉬이 전달할 수 없는 '원초적 소통 불가능 상태'를 상정한 상태에서 남에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기를 바라고 상대가 자신의 말의 의미를 알아 주기를 바라는 것은 스스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일종의 '시지푸스'와 같다.(중략)

말을 하나 그 말을 음운적으로 알아듣기만 할 뿐 그 말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필연적인 숙명과 같아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은 스스로 고독할 수 밖에 없다. 고독한 인간은 그 고독함을 해소하고자 실재를 가정하고, 절대자를 가정하고, 온전한 진리를 가정하여, 가능한 것을 믿어버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 다시 말해 '나'라는 세계에서는 현실의 불가능한 조건들은 자신의 의도에서 극복이 되나 결국 자신의 세계로 끊임없이 침잠할 뿐이다.(중략)

결국 온갖 메아리로 북적이는 요란스러운 고요한 평원 위, 남아 있는 고독하고 외로운 '그'의 정신만이... 세계를 바라본다.(후략)

Posted by 종합유추

동일한 현상을 관측하면서 서로 다른 사실을 생각한다. 이 단순한 사실에서 중요한 것은, 태양이 어떤 방식으로 돌고 있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두 사람 모두 각자의 관찰을 '사실'로 믿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단순한 점은 이제 창조론자와 무신론자의 천지창조에 관한 입장차이에서도 드러난다. 무신론자의 경우에는 흔히 과학적 이론이 현실과 그대로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 반면에 유신론자의 경우에는 과학적 이론에 비해서 그 과학적 이론 뒷편에 그 현상들을 매개하는 본질적인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는 부류라고 말할 수 있다. 무신론자가 유신론자의 천지창조 가설을 공격하는 우스운 방법중에 하나가 신이 7일간의 천지창조 기간동안 현대 과학에서 사용되는 이론들을 모두 만들었다고 비꼬면서, 신이 무에서 그런것들을 만든 이유는 과학자들을 교묘하게 속이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과학의 본성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의 과학근본주의자들이 주로 하는 이야기로, 과학이라는 것은 사실 감각적으로 지각되어지는 것들에 대해서 인공적으로 통제를 하여 특정한 규칙성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류에 가까운 것이지 세계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이 아님으로, 신이 과학적인 이론을 만든것이 아님을 쉽게 말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들은 '과학이라는 신'이 그들이 관찰하는 자연보다 앞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말할 수 있다.(후략)

Posted by 종합유추

타인의 심적 상태를 이해하려 시도하고 그 결론을 내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엄격하게 그 자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나 싶기도 하다.

가끔 나는 타인의 사고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고의 '심상'을 가정하고 타인의 이해방식을 혼자만의 방법으로 생각해보지만, 내가 타자의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상상한 것이 상대의 사고와 같은지 혹은 유사한지 조차 알 수 없고 유일하게 대상이 나와 '유사하다'라고 일컬어지는 사고를 하는것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반응을 통하여 지레짐작하는 방법만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과정에서 가끔 서로 유사한 사고를 했다는 것을 반응에서 서로 관찰하며 맞장구를 치나 그렇다고 하여 그 과정 자체가 같으리라는 법은 없을것이다.

...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성이라는 가벼운 결론에 도달하는 가운데에서도 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내 사고 속에서 발생하는 그 추론의 '느낌'은 매번 그 사고를 할 때마다 새로우며 관계적으로 유사 경험을 제공해주는 구조일지는 몰라도 실질적으로 그 같음을 간주할 수 있으나 확신하기는 무엇보다 어렵다.

나의 순수한 감각에서조차 순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동일한 명제라고 일컬어지는 것에 있어서 동일함이 결론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일함의 개념을 대상들의 관계적 경험에 덧붙이는 것이라면 과연 무엇이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가끔 개념적으로 잘 훈련된 사람들은 이러한 동일한 감각을 덧붙인 개념이 실재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보편적 가치와 당위와 같은 것이 그러한 것인데 그것은 마치 그들의 마음에서 변동이 없는 고정된 것으로 박제되어 있는 것 같아서. 합의된 약속 이상의 신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가끔 나는 타인과 대화할 때 주제넘게 타인의 심적 상태를 온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종에 개념의 환상에 빠지는데, 그것은 관찰된 행동에서의 예측가능함에서 나타나는 통제의 느낌일 뿐 대상의 심적 상태를 온전하게 통제한다거나 알고 있다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습관이 되어 자연스럽게 해왔던 것에 의식을 집중하는 순간 그것은 낯설게 다가온다. 습관적으로 호흡을 하는 경우와 다르게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면 뭔가 그 느낌 자체가 낯설어지는 것에서나, 암기해 둔 바이올린 곡을 연주하는 가운데에서도 그 흐름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과정을 의식적으로 주시하면서 연주를 하다보면 곡의 연주의 느낌이 낯설어지는 것도 하나의 예시가 될지 모른다.

 

Posted by 종합유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