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고자고 외치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회를 망치는데 일조한다는 사실은 역설이다.
2. 누구든 말로는 중력도 거스를 수 있고, 하늘에 있는 별도 따올 수 있다. 결국 그 가운데 따져야 할 것은 정말 하늘에 별을 따올 수 있느냐와 하늘에 있는 별을 따오는게 그렇게 비용 대비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누구든 말로는 이상사회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따져야 할 것은, 정말 그런 이상사회가 현실에 구현될 수 있느냐는 것과 그것을 현실에 구현했을 때 만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과도한 희생이 끊임없이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이상사회냐는 것이다.
3. 개인적으로 운동권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친구중에 운동권 사람은 많은데, 왜 그런지야 나도 모를일이다. 내 경험상 그들의 주장은 대체적으로 현실성 없고, 교육체제가 만들어낸 신념의 부산물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유 평등을 말하지만 그들은 정작 어떤 상태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이고 어떠한 상태가 본질적으로 평등한 상태인지에 대한 논술을 하지 못한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가자고만 주장한다. 자신들의 말에 따르면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심히 무례하고도 오만하며 선동적인 발언으로 보인다.
나는 직관적으로 내 앞에 있는 것이 나와 같이 사람이라는 종으로 불리는 것을 알지만, 외형의 유사성을 제외한다면 저자와 나는 분명히 '다른 존재'임을 안다. 이 두가지의 존재를 평등하게 대하기 위해서는 그 두개가 같음을 말해야 한다. 법의 추상성, 다시 말해 법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는 개념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법 앞에서의 평등이 말하는 것은 마치 수학에서의 개념과 같다. 수학의 1은 1과 다를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1과 1이 같다는 것은 모두가 합의한 약속에서 비롯된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사적언어와 공적언어'의 문제를 연관하여 지금 말한 1과 이후에 말한 1의 본질의 속성이 동일한가에 대해서 묻는다면, 그것은 생활세계에서 상대와 내가 합의한 1의 개념에 대해서 너무나 추상적으로 접근한데 있다 할 것이며, 여기서의 논의는 1=1 수준의 자명함과 같은 인간이라는 종적 분류이다.
사과 한개, 배터리 한개, 종이 한개 이런 여러 물질의 수를 셀 때 나는 '한개'라는 말을 사용한다. 여기서 한개라함은 대상에 대한 개념적 구분이 대상인것과 대상이 아닌 것 두개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가운데 대상의 개념이 지향하는 것에 대해서 대상이 아닌것을 포괄하여 대상이 아닌 것에 대상인 속성을 갖는 것이 없다 할 때 그것은 한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심히 인지적이며, 상대가 나와 같은 인식적인 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법 마치 이와 같다. 법에서 규정하는 자연인과 법인은 이런 색채이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공통적인 속성으로부터 인간 일반의 개념을 도출하고, 도출한 인간 일반의 개념에서 그 개념의 색채를 정의한다. 이는 1을 정의하고 1 + 1 = 2, 1 * 1 = 1, 1 - 1 = 0 의 규칙성을 발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수학에서는 +와 - 그리고 * /를 사용하지만 법에서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행위가 가지고 있는 규칙성을 분석하여 그것을 체계화하여 어떠한 규칙으로 추상화된 개별 인간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책임을 규정하고, 그런 프레임 내에서 끊임없이 순환하는 하나의 순환시스템을 형성해내는 것이다.
또한 그 일반적인 순환시스템 위에, 그 순환시스템을 다시금 검토하는 새로운 점검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고, 이것이 결국 성문법의 엄격함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 항상 학설상의 문제가 등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렇다면 + 의 규칙은 무엇인가와 -의 규칙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을 넘어서서 내가 말하는 + 와 당신이 말하는 + 가 같은 +냐 하는 것이 결국 그런 문제인데, 이것은 다시금 원자적인 동일성을 넘어서서 분자적인 동일성에 대한 물음으로 연결된다. 결국 강학상의 문제로 논거되어 최적의 설명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정과 반의 결합으로 합으로 나아가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속에서 목적지는 없다. (헤겔은 절대지성을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절대지성은 그냥 목적에 대한 추상적인 표현일 뿐 실제로 헤겔도 절대지성이 무엇인지 모르고 단순히 지향하는 방향에 대해서 표현하기 위해서 차용한 지성이라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순환을 하든 혹은 방향성이 있든 그것은 합의의 효력으로 합의 이후에 나의 통제가능성을 일부 이양함으로써 공준된 합의체제내에 자신의 의사를 포섭하는 그런 것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감정적인 것을 합의했던가 아니면 이성에 합의했던가, 따져보고 논의하여 그 결과 나타나는 노력에 기울인 것이 설득력을 가질 때 너와 나는 이 사회에서 합의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런 가운데서 이런 '합의'의 속성이 나와 상대가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것과 전혀 같은 층위에서 논구되어서는 안 된다는 굉장히 자명하고 추론적인 사실을 부정하는 자들에 대한 반감은 내 생각에서 보았을 때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내 생각에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척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기하학과 같이 매우 자명한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4. 사회를 유지해야하는가 혹은 사회를 유지하지 말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사회에서 벗어나려 한다. 반사회적으로 행동하고, 교육이 필요없다고 하고 사고의 통제가 필요하지 않다 말한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사람들은 서로 필요해서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런 가운데 사회 밖에 있는 위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사회 밖을 동경하고 사회의 체제를 붕괴하려 하는 것은 다시 공포과 기근 굶주림으로 자신을 던지는 그야말로 무모한 짓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한다면 그래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나와 당신들이 만든 '합의의 규칙'이고 그런 합의의 규칙에서 내가 마지막까지 그 결과의 발생을 예방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그것을 원한다면 그들에게 그런 결말을 보여주는 것이 적합한 것이다.
한국은 1950년대 북한과 대립각에서 발생하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자립적으로 산업조직을 구성하고 제조업 위주의 생산시스템을 형성하여 국가의 이름으로 국채를 발행하면서 끊임없이 현재까지 국가를 발전시켜왔다. 하지만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특유의 위험성과, 처해있는 환경은 앞으로도 위기에 고통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어찌보면 한국의 상황에서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노동환경이 다른 국가에 비해서 좋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어찌보면 모두가 생존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체제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 복지를 논하고, 환경이 전혀 다른 국가를 이야기하며 한국도 그럴 수 있지 않냐고 묻는다. 일종에 보편에 대한 환상, 어디든 같은 정책을 취할 수 있다는 그런 비교의식은 한국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통찰이 없는 말 그대로 유아적 칭얼댐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유아적 사고를 가진 자들이 다수고, 그자들이 그런 선택을 하여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나가길 바란다면, 보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탈출하여 다른 국가로 갈 수 있다고 하여 간다면 그것은 나를 키워주고 먹여주며 가르친 한국에 대한 의무 불성실이다. 이것은 내가 배운것에 적합하지 못하다. 기울어져 가는 배에서라도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해가며 배를 다시금 움직이게끔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스러져가는 국가라는 배에 타고 있는 지식인의 책임일 것이다.
아버지의 책임이란 이런것이 아니던가.
5. 그런 이유에서 죽음은 나에게 삶이라는 의무로부터 자유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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