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그 다지 사회문제와 연결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사회 문제를 말하는 이유는 아직 내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것들 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하겠다. 이것은 내가 부족하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된다. 아마 현준이 형이 보면 나한테 '넌 이미 정도를 너무 벗어났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2. 누구든 유토피아를 그릴 수 있고, 누구든 천국을 그릴 수 있고, 그것을 현실세계에 가져올 수 있다.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세계가 지상에 내리시니'와 '교회'가 나는 그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공산주의 유토피아(정확히는 마르크스가 말하지 않고 해석된)와 이런 '교회'나 '하느님의 세계'는 사실 그 맥락이 전혀 다르다고 본다. 하느님의 세계는 어떤 특정한 행동이나 관계적인 측면을 호소하고 있는 반면에 일부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물질'에 까지 손을 대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도들은 그냥 자신만 바꾸면 될 것을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에서 넘어서서 '타인'의 범위까지 일종의 침해를 하고 바꾸려 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흔히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피켓을 들고다니면서 광신적으로 타자에게 자신의 신앙을 믿기를 바라는 일종의 '광신자 집단'은 기독교 측에서도 좋은 태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최근에 만나는 고렙 목사님의 의견으로는 사실상 기독교 아이디어에서 중요한것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지 그에 반대급부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 아무리 저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고 괴롭혀도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포용하며 그들에게 사랑으로 베풀었을 때 사랑으로 그들을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아이디어. 사실 이것은 어떠한 물질적인 기반도 필요 없다. 그저 개인의 '행동'만이 동반되면 된다.
하지만 그 변화가 단순히 '개인의 행동'을 넘어서서 뭔가 물질계를 바꾸려고 시도하다 보면 이게 좀 심각하게 어려워진다. 결국 정신적인 방법에서 넘어서서 '현실적인 문제'에 까지 손을 대겠다는 것인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현실에 대한 이해와 자원 - 소비 - 사회 의 단계를 구성하는 각 차원에 굉장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모든 것이 통제 가능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해지는데, 사실 이것은 달성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이상. 이것은 행동도 바꾸어야 하며 자원도 바꾸어야 하며, 심지어 '자연'도 바꾸어야 한다.
공산주의적인 이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아마 모든 사람들을 인공적으로 동일한 인간으로 만들어야 할텐데 이것은 나는 어렵다고 본다. (사실 나는 그들이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이고 자율적인 사회 모형을 전혀 본적도 없기 때문에 만일 이것을 보여준다면 생각이 바뀔수도 있다.) 나는 미국에 있는 모 청교도 집단처럼 어떠한 전자기기도 사용하지 않은채 외부와의 어떠한 교류도 일절 안 하면서, 자급자족 하는 사람들의 생활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생활은 풍요롭지도 않으며, 거의 매일을 일을 해야하며, 다만 그들의 신앙에서 비롯된 정신적인 만족만이 그들을 풍요롭게 할 뿐이다.
100억의 유산을 상속 받은 3살짜리 뽀로로를 좋아하는 꼬마아이에게 뽀로로로 가득찬 방을 보여주면서 너의 100억을 주면 이 방을 너에게 주겠다고 할 때 100억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하는 꼬마아이는 분명히 이 거래를 승낙할 것이다.
3. 나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고통의 여부'를 하나의 판단 기준으로 본다.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 자기 스스로가 고통을 겪었다고 대면에서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이 없었다. 이 고통을 겪은 부류는 크게 세가지의 부류인데, 하나는 고통을 실제로 겪었지만 그것에 순응한 사람의 부류이고 두번째는 고통을 실제로 겪었지만 그것에 반항한 사람의 부류이고, 세번째는 고통을 겪은적도 없으면서 고통을 겪은채 하는 사람들. 나는 이 기준을 사람의 성격을 구분하는데 실제로 사람을 파악할 때는 하나의 요소로는 사용하긴 해도 어떤 절대적인 기준으로 이것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보통 어렸을 적에 엄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의 경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에 순응한 경우에는 굉장히 규칙에 대해서 민감하다고 나는 보는데. 그들은 종종 '~해야 한다.'는 명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고, 규범적인 것들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이것은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이다.' 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듯한.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그에 반항을 잘 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러하겠지의 방식으로 가고. 그것을 디펜스하기 위해 어떠한 방법이든 사용하는 것 같아 보임. 근데 이게 또 실질적으로 그런 경우가 있고 형식적으로 그런 경우가 있는데, 실질적인 사람들은 좀 일관된 편, 반면에 형식적으로 순응하는 사람들은 밖에서 그런 규칙을 잘 준수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묘하게 그 규칙을 이용하는 듯해 보인다고 말하고 싶음.
다음으로 엄한 가정에서 자랐지만,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에 순응하지 않은 경우는 좀 인상적인데, 그 순응하지 않는 방법이 적극적이냐 소극적이냐에 따라서 또 구분됨. 적극적으로 순응하지 않는 경우에는 보통 '반항'으로 일컬어지고, 사실상 이게 트라우마로 남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기존 규범에 대한 반항으로 나아가는 듯, 그에 반해서 소극적으로 행동은 그 규범에 맞추어 행동하지만 말로는 끊임없이 불만을 제기한다던가. 뭐 그런 부류, (쉬운 설명으로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된 아이의 경우에는 그 폭력에 적응하고 순응한 경우와, 폭력에 반항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나싶음. 전자의 경우에는 뭔가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한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자연스럽지만 반규범적인듯한.)
마지막 세번째는, 엄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고통을 겪은척하는 사람들의 부류인데 가능성이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우에는 '고통의 여부'에서 다루기 힘들고, 고통은 배제하는 것이 좋은 편. 이 사람들이 '당해본 사람' 보다 더 '당해본 사람'처럼 행동하는데, 마치 연기하는 과잉성이 보임. 물론 케바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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