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할 이야기도 많다. 자기 전에 간략하게 적자면 다음과 같다.

1. 의무만 있는것도 없고 책임만 있는 것도 없다. 더욱이 평등이라는 이름의 체제하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실권자가 있기 마련이고 항시 힘을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문제들이 발생한다.

어떤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라면 그 문제는 필연코 영향력이나 힘의 문제가 발생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뜻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크게 두가지 방법을 쓰는 것 같은데. 하나는 강압이나 혹은 강압과 유사한 힘으로 상대방을 눌러버린다거나 다른 하나는 적합한 방법을 통해서 상호간의 합의점을 도출하는 방법이 그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전자와 후자를 결정하는 요인은 일종의 그 사회집단의 비판력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는데, 대화와 토론 그리고 합의와 건전한 비판과 사실의 정확한 따져봄의 노력에 의해서 형성된 사회의 경우에는 후자의 전통이 제안될 가능성에 가깝고, 그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감정이나 흔한 경기 관중의 bias를 가진 국가의 경우에는 전자에 가깝다.

전자와 후자 모두 발생가능한 현상이기는 하나 나는 후자의 상태를 좀 더 긍정적으로 보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비록 그 정치적인 것이 편중되는 경향성은 있으나 필연적으로 엄밀하게 따져봄에서 발생한 합의이기 때문에 사실상 사회내 힘의 통합이 수월하며, 전자의 경우에는 언제든 사람들에게 어떠한 bias를 심어주는가를 통하여 매 순간 그 힘의 방향이 변하여 분산이 쉬이 발생하는데 힘의 통제의 측면에서 비효율 적이라고 말하겠다.

나는 한국의 피상적인 사회가 전자에 가깝다고 보며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정부도 마찬가지고 그것에 반항하거나 따라가는 국민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입법의 과정에서 제안되는 입법안을 살펴본다면 꽤 체계적이고 설명력있게 쓰여져 있는 경우가 많기에 그들의 노력을 전자와 같은 것으로 본다는 것은 그들의 설명을 위한 노력을 비하하는것과 같이 느껴져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많은 수의 사람들은 어떤 구체적인 합의를 도출하려고 하기보다는 한 순간의 자신의 욕구나 자신의 의지만를 실현하려고만 하면, 그 대립은 결국 나도 너 말을 안 듣고 너도 내 말을 안 들으며 서로 이해할 노력은 하기 싫으니 그냥 계속 비능률적으로 다투고 싸웁시다 하는 정도의 이야기로 들린다는 점은 꽤 부정적으로 보인다.

예를들어 예전에 언급한 바 있듯이. 등록금을 인하하라는 요구에 대해서 굳이 나는 한국의 대학 등록금은 시장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내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데. 간략하게 당시의 생각을 요약하자면,

'한국의 대학은 학생들을 실질적으로 교육하는것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학벌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판매하기 위한 기업의 성격을 더욱 강하게 띄고 있다. 이것은 시장분석에서 내가 이야기 했던것과 같은 맥락을 띄고 있는데 기업의 생산관리의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분석이고, 시장 분석이라 함은 시장의 예상되는 수요자의 선호를 분석하여 어떠한 방법으로 제품을 공급했을 때 최대의 이익을 누릴 수 있는가가 그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대학이 기업과 같은 속성을 보인다면, 필히 그 수요자의 성향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해야함이 분명한데, 대학교에 오는 많은 학생들을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함과 좋은 학벌을 얻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대학들은 과연 이러한 시장의 수요자의 성향에 자신들의 공급을 맞춰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학벌을 얻거나 혹은 돈을 벌기위해서 학교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게 하고 혹은 다른 연구나 공부를 하고 싶어서 오는 학생들에게는 그에 맞게 그들의 성과나 사고 능력을 염두해두고 장학혜택을 주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마치 아이스크림 회사들의 처음 균형가격만 높게 기록하여 가게등에 판매하고 그것을 재판매하는 사람들에게 자율적으로 가격차별을 행할 수 있게 만들듯이. 국가도 대학에게 그렇게 할 때 소비자의 성향에 맞는 공급을 할 수 있을 것인바. 대학등록금에 대해서 규제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가 주요논지인 글에서처럼 정당한 논리하에서 상대방에게 어떤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합당한지를 따져보는 글에서와 같은 방식의 논리성과 합의의 개념이 들어간다면 적절할 것이고. 현재 한국에서와 같이 끊임없이 자신의 것을 요구할 생각만 하며 합의의 개념을 거부하고 자신의 가치의 온전함만을 자신의 세계 넘어서 현실에 세우려고 하는 것는 감히 말하건데 병신짓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결국 이 과정에서는 왜 이게 필요하고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며 그것의 실현가능성은 있고 타자와의 이익조율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 엄격하게 따짐의 합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미성숙한 어린아이의 인간상과 비슷하다고 나는 말하며, 나에게도 그런 면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2. 주변에 연애를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에게 오지랖을 좀 부리자면, 내 관점에서는 사실 연인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친한 친구와도 같은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선호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그 방법은 굳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나는 본다. 서로가 서로를 관계상 선호하기 때문에 관계가 발생하고 관계의 존재라는 선재조건이 없으면 결국 연인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관계도 없기 때문에 연인의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연인 사이에는 무슨 '사랑해'라는 말을 남발하고, 매일 한번쯤은 연락하고, 매일 오글거리는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라고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상 나는 이것을 매스컴이 만들어낸 일종의 괴랄한 규범적인 연인 관계라고 생각한다. 순전히 이것은 관계이기 보다는 연인이라는 환상이며, 이것을 기대하고 관계를 성립시킨다는 것은 요새 유행하는 금사빠(?, 맞는지 모르겠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관계라던데)와 같은 것으로 자연스럽지 못한 상태를 발현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해진다.

친한 친구의 관계를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데, 나와 친한 친구인 현준이 형의 예시를 들어보자. 현준의 형과 나는 처음부터 우리는 좋은 친구야!라고 말하고 만나지 않았다. 설령 지금의 상황에서도 '앞으로 우리는 이 관계를 좋은 친구의 관계로 규정합니다.'에 관한 요식계약서도 쓴 적이 없다. 서로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취미가 맞아서 친해졌고, 각자가 자신의 선호에 맞게 상대방에게 자신의 방식으로 대함으로써 그리고 서로가 그 방식에서 상대방을 자신의 방식으로 선호함으로써 좋은 친구라고 불릴만한 관계가(아 물론 현준이 형은 나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자연스레 성립했다. 이것은 연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상대방과 굳이 우리는 연인사이야 해야지 연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선호가 있고 상대방이 자신을 향하는 모종의 선호가 있어 그 관계가 성립항 때 자연스레 연인이든 친구든 어떤 관계가 도출된다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 외형상의 멋진인간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옆에 있을때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라고 말하겠다.

흔히 말하듯, 먼 곳에서 연인을 찾지 말고 가까운 근처를 보세요. 가 나는 이런 맥락이라고 이해를 한다.

오늘은 이만 줄이자.

Posted by 종합유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