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어른이 된다는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보곤한다.
20대 초반부터 좋은 어른이란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봤지만 좀체 '좋은 어른'이란 것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해서 쉽게 상상할 수 없었던 본인에게 있어서, 좋은 어른이란 다가갈 수 없는 허상도 같아, 앞으로 좋은 어른이 되어야 겠지만 보이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어제인가 좋은 어른이란 감정을 숨길 수 있고, 사람간의 관계를 능히 계산하며 관리할 수 있는 자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되었든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우호적인 사람 앞에서라면 모르겠지만 적대적인 사람간에서는 다툼이 발생하게 되어있다. 다툼이 발생하면 비용이 발생하고, 그 다툼이 '쉽게 해소될 수 없는 다툼'으로 남을 때에는 이후에 어떤 상황에서 자신이 그 사람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무엇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한다던지의 비용이 발생하며, 지속적인 긴장등은 간접적 비효용으로 남고, 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항상 마음 언저리에 찜찜한 듯한 불안으로 남는다.
예전 현기형이나 도결형의 행동들은 보면 그런 좋은 어른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뜬금없이 드러날만한 불확실한 상황이 아니라면 대체로 그들에 대한 평판은 좋았다. 논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체로 웃으면서 자신의 구체적인 의사를 감춘 채 사람을 대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심리상태를 쉬이 추적하기 어렵지만 그만큼 또 그에게는 적이 없어 걱정해야 할 일도 없고. 생활에 장애 또한 없다.
그에 비해 나의 삶은 어떤가. 항상 분노에 차 있다. 나름 부족한 지식으로 내 범주 하에서 납득가능한 부분에서 논리적 완결성을 찾으려고 하고. 그 가운데서 타인과 나의 생각에는 항시 충돌이 발생한다. 그 가운데 감정이 상하기도 하고. 혹은 모욕 등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하고 그런 것이다.
아무리 스스로의 생각이 타당하더라도. 상대의 논리적 추정이 아무리 봐도 세련되지 못하고 타당하지 못하더라도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의견을 개진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분쟁이란 일어나지 않고. 상대를 설득하는 노력 역시 필요하지 않다. 굳이 말하지 않고 중요한 논리는 나만 알고 필요한 정도의 사람에게만 알게 하면 후에 이익이 발생했을 때 좋은 인상도 받을 수 있으며 굳이 저항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런 것. 어찌보면 맨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그런 가면을 쓰고 사는 것이 좋은 어른이 아닌가 생각했다.
가면을 쓰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와 같은 추악한 얼굴을 감출 수 있으니, 가면을 쓰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다운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