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99년작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 '파이트 클럽(Fight Club)'의 초반부에는 에드워드 노튼(이하, 나레이터)이 불면증을 호소하며, 암환자 모임이나 혹은 중병에 걸린 사람들의 모임을 찾아다닌다. 물론 본인이 실제로 그런 병들에 걸린 것은 아니며, 그런 병들에 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매번 새로운 모임에 나갈 때 마다 이름을 바꾼다. 각각 모임에 다른 외관을 작출하고, 새로운 인격으로 그들의 고통을 간접 체험한다. 그 가운데 정작 본인은 없다. 그들의 고통에 울지만, 정작 스스로는 그런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 한 구석에는 내심 안도한다. 3개 이상의 모임에 나다니면서도, 자신이 그런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지만, 각각의 모임에서 그는 다른 사람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 '일회용 인격'에 '일회용 친구' '일회용 모임'.
그와 함께, 그에게 찾아온 욕구불만을 상징하는 불면증도 사라진다.
2. '나레이터'의 위장생활은 헬레나 본햄 카터(이하, 말라 싱어)의 등장과 함께 파괴된다. 말라 싱어가 나레이터와 유사한 심리적 욕구불만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나레이터와 같이 중병 환자의 모임을 다닌다.
나레이터는 아무도 자신이 외관을 작출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가운데서 나오는 자유와 안도감을 상실하고, 다시금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다.
누군가(말라 싱어)는 자신이 그런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순간, 나레이터의 이중생활은 더 이상 이중생활이 될 수 없다. 완전히 사회적으로 독립적이었다고 생각했던 현실의 나레이터와 가상의 인격에 교집이 발생한다. 행위에는 제약이 발생하며, 독립된 인격으로 누리는 자유도 사라진다.
3. 작중에서는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사실상의 주인공인 에드워드 노튼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의 유력한 대사는 10주년판 DVD 19분 10초의 '말라 싱어'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19분 10초에서 나레이터의 명함을 받은 '말라 싱어'는 '나레이터'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름은 없네, 뭐야?, 코넬리우스?, 루퍼트?, 트래비스?, 그 중에 진짜 이름 있어?"
4. 중반부에 들어가게 되면, 나레이터는 그의 이중 인격인 브래드 피트(이하, 타일러 더튼)와 자신의 모임을 만든다. 이름은 제목과 같은 파이트 클럽. 그곳은 기존의 사회와 같이 지켜야 할 예절도 없고, 가식도 없다. 그저 파이트 클럽에서는 죽도록 싸우고 무슨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문제가 없다. 다만 상대가 그만이라 할 때는 싸움을 멈춰야 한다. 사회에 포함된 개인으로 억압되어야만 하는 폭력성(누군가는 이것을 남성성이라 부른다.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을 여과없이 방출한다.
그것이 파이트 클럽의 매력이다. 파이트 클럽 규칙 제 1조, 파이트클럽의 존재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위의 1과 2를 참고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제 7조, '싸울 수 있을 때까지 싸운다.' 제 8조, '파이트 클럽에 처음 방문한 사람은 반드시 싸운다.'
5. 영화시간 44분, 나레이터는 다음과 같은 묘사를 한다. "이 녀석 리키는 사무실에서 어벙벙하지만 식당 웨이터를 때릴 때는 비호같았다. 비명소리를 뒤덮는 둔탁한 파열음. 피를 뿜으며 내지르는 신음. 거긴 생명력이 넘쳤다. 그러나 파이트클럽은 그 순간만 존재했다. 그 순간이 지나면 모두 딴 사람이 된다. 클럽에서와는 전혀 다른 표정.."
6. 1시간 2분, "안 돼 넌 환자가 아니야, 고통을 피하지 마...저항하지마, 먼저 깨달아야 해 언젠가 너도 죽는다는 걸..다 잃어봐야 진정한 자유를 얻게 돼." 1시간 10분 "우린 필요도 없는 고급차나 비싼 옷을 사겠다고, 개처럼 일한다. 우린 목적을 상실한 역사적 고아다.. TV를 통해 우리는 누구나, 백만장자나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게 환상임을 깨달았을 때, 우린 분노할 수 밖에 없다 "
7. 파이트 클럽의 성격이 기존 사회적 관계에서의 억압에서의 도피와 같은 것이라 기존에 말한 바 있으니,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작품 후반부에는 파이트 클럽 역시 그 성격이 변질된다. 기존의 사회적 관계에서의 불편으로부터 파이트 클럽이란 이름의 새로운 사회로 도망하여도, 새로운 사회에서의 불편은 존재한다. 기존의 사회에서 불편을 느꼈던 관계간의 개인을 상징하는 이름도 없고, 규칙도 없고, 질서도 없다. 혐오라고 불렀던 것과 질서라고 불렀던 것이 반전된다. 혐오는 새로운 질서요, 기존의 질서는 새로운 혐오다. 욕망이라는 거대한 급류위에 개인은 없다. 기존의 사회에서 탈출하여 구하고자 했던 '개인'은 새로운 사회에서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다 하나같이 실험용 우주원숭이가 될 뿐이다.
조직원의 이름 따위 중요하지 않다. 그저 조직원의 사망했다는 사실, 그리고 경관이 조직원을 쏘았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누구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1시간 45분) 나레이터가 그의 친분있는 밥 폴슨의 죽음에 격분하여 그의 이름은 밥 폴슨이라 지시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새로운 구호로 그들에게 받아들여질 뿐이다. '밥 폴슨'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의 이름은 밥 폴슨'이라는 구호가 중요할 뿐이다. 그 가운데 '나'는 없다.
가면을 쓰고, 새로운 인격을 연주하더라도, 결국 자기 자신을 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소비하는지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그것이 소비주의 사회의 개인이다. 그렇다면 그것과는 대조되는 다른 사회라고해서 어떨까. 그곳에는 개인이 존재하는가? 사회적 규율과 동 떨어진 '개인'이 존재하는가.
일시적 도피이든 영구적 도피이든, 결국 종속되고야만다. 유사(流砂)에서 허우적 거린대봐야 더욱 더 빠져들게 된다. 자신을 구했다는 일시적 안도감. 예와 식을 벗었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서는 결국 다른 예와 식이 생긴다. 일시적 만족감일뿐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매번 새로운 모임에 나갈 때 마다 이름을 바꾼다. 각각 모임에 다른 외관을 작출하고, 새로운 인격으로 그들의 고통을 간접 체험한다. 그 가운데 정작 본인은 없다. 그들의 고통에 울지만, 정작 스스로는 그런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 한 구석에는 내심 안도한다. 3개 이상의 모임에 나다니면서도, 자신이 그런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지만, 각각의 모임에서 그는 다른 사람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 '일회용 인격'에 '일회용 친구' '일회용 모임'.
그와 함께, 그에게 찾아온 욕구불만을 상징하는 불면증도 사라진다.
2. '나레이터'의 위장생활은 헬레나 본햄 카터(이하, 말라 싱어)의 등장과 함께 파괴된다. 말라 싱어가 나레이터와 유사한 심리적 욕구불만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나레이터와 같이 중병 환자의 모임을 다닌다.
나레이터는 아무도 자신이 외관을 작출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가운데서 나오는 자유와 안도감을 상실하고, 다시금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다.
누군가(말라 싱어)는 자신이 그런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순간, 나레이터의 이중생활은 더 이상 이중생활이 될 수 없다. 완전히 사회적으로 독립적이었다고 생각했던 현실의 나레이터와 가상의 인격에 교집이 발생한다. 행위에는 제약이 발생하며, 독립된 인격으로 누리는 자유도 사라진다.
3. 작중에서는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사실상의 주인공인 에드워드 노튼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의 유력한 대사는 10주년판 DVD 19분 10초의 '말라 싱어'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19분 10초에서 나레이터의 명함을 받은 '말라 싱어'는 '나레이터'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름은 없네, 뭐야?, 코넬리우스?, 루퍼트?, 트래비스?, 그 중에 진짜 이름 있어?"
4. 중반부에 들어가게 되면, 나레이터는 그의 이중 인격인 브래드 피트(이하, 타일러 더튼)와 자신의 모임을 만든다. 이름은 제목과 같은 파이트 클럽. 그곳은 기존의 사회와 같이 지켜야 할 예절도 없고, 가식도 없다. 그저 파이트 클럽에서는 죽도록 싸우고 무슨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문제가 없다. 다만 상대가 그만이라 할 때는 싸움을 멈춰야 한다. 사회에 포함된 개인으로 억압되어야만 하는 폭력성(누군가는 이것을 남성성이라 부른다.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을 여과없이 방출한다.
그것이 파이트 클럽의 매력이다. 파이트 클럽 규칙 제 1조, 파이트클럽의 존재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위의 1과 2를 참고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제 7조, '싸울 수 있을 때까지 싸운다.' 제 8조, '파이트 클럽에 처음 방문한 사람은 반드시 싸운다.'
5. 영화시간 44분, 나레이터는 다음과 같은 묘사를 한다. "이 녀석 리키는 사무실에서 어벙벙하지만 식당 웨이터를 때릴 때는 비호같았다. 비명소리를 뒤덮는 둔탁한 파열음. 피를 뿜으며 내지르는 신음. 거긴 생명력이 넘쳤다. 그러나 파이트클럽은 그 순간만 존재했다. 그 순간이 지나면 모두 딴 사람이 된다. 클럽에서와는 전혀 다른 표정.."
6. 1시간 2분, "안 돼 넌 환자가 아니야, 고통을 피하지 마...저항하지마, 먼저 깨달아야 해 언젠가 너도 죽는다는 걸..다 잃어봐야 진정한 자유를 얻게 돼." 1시간 10분 "우린 필요도 없는 고급차나 비싼 옷을 사겠다고, 개처럼 일한다. 우린 목적을 상실한 역사적 고아다.. TV를 통해 우리는 누구나, 백만장자나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게 환상임을 깨달았을 때, 우린 분노할 수 밖에 없다 "
7. 파이트 클럽의 성격이 기존 사회적 관계에서의 억압에서의 도피와 같은 것이라 기존에 말한 바 있으니,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작품 후반부에는 파이트 클럽 역시 그 성격이 변질된다. 기존의 사회적 관계에서의 불편으로부터 파이트 클럽이란 이름의 새로운 사회로 도망하여도, 새로운 사회에서의 불편은 존재한다. 기존의 사회에서 불편을 느꼈던 관계간의 개인을 상징하는 이름도 없고, 규칙도 없고, 질서도 없다. 혐오라고 불렀던 것과 질서라고 불렀던 것이 반전된다. 혐오는 새로운 질서요, 기존의 질서는 새로운 혐오다. 욕망이라는 거대한 급류위에 개인은 없다. 기존의 사회에서 탈출하여 구하고자 했던 '개인'은 새로운 사회에서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다 하나같이 실험용 우주원숭이가 될 뿐이다.
조직원의 이름 따위 중요하지 않다. 그저 조직원의 사망했다는 사실, 그리고 경관이 조직원을 쏘았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누구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1시간 45분) 나레이터가 그의 친분있는 밥 폴슨의 죽음에 격분하여 그의 이름은 밥 폴슨이라 지시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새로운 구호로 그들에게 받아들여질 뿐이다. '밥 폴슨'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의 이름은 밥 폴슨'이라는 구호가 중요할 뿐이다. 그 가운데 '나'는 없다.
가면을 쓰고, 새로운 인격을 연주하더라도, 결국 자기 자신을 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소비하는지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그것이 소비주의 사회의 개인이다. 그렇다면 그것과는 대조되는 다른 사회라고해서 어떨까. 그곳에는 개인이 존재하는가? 사회적 규율과 동 떨어진 '개인'이 존재하는가.
일시적 도피이든 영구적 도피이든, 결국 종속되고야만다. 유사(流砂)에서 허우적 거린대봐야 더욱 더 빠져들게 된다. 자신을 구했다는 일시적 안도감. 예와 식을 벗었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서는 결국 다른 예와 식이 생긴다. 일시적 만족감일뿐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