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유추 2015. 4. 15. 01:08

아까 우연치 않게 상천씨의 글에 '전쟁은 매우 예술적이다.'라는 말을 남겨서 아마 '김효영 얘 또라이 아니야?'라는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왜 내가 전쟁이 미학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현준이 형과의 대화에서 나온 나의 간략한 이야기를 남긴다.

나는 전쟁을 일종의 다른 방식의 축제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그 자체의 속성만을 따져본다면 대체적으로 전쟁은 매우 비극적이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매우 비인간적이며, 규범적인 것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것으로 규범에 맞추어 나는 생각한다. 전쟁이라는 것은 통상적으로 발생했을 때 매우 끔찍하며,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 가운데 개인은 스스로의 인간성을 상실한 채 살인기계가 되어 살인행위를 반복하거나, 혹은 죽음이 두려워 스스로의 판단 능력을 잃어버리고 공포에 질려 벌벌 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한 인간답지 못하다. 전쟁은 분명히 예방되어야 한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은 지지를 보낼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반하지 않는 내가 왜 '전쟁'이 다른 방식의 축제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간략하게 말을 하자면, 전쟁의 발발은 곧 평상시에 비해서 더욱 끔찍할 정도의 비극들이 탄생하고, 부와 풍요를 상징했던 것들의 그 속도를 알 수 없는 탕진이 발생하며, 그것은 이성을 통하여 그것의 '합리성'을 고려하는 효익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쏟아버리고, 태워버리고, 파괴하는 원시적인 축제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세 가지의 관점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전쟁 자체에 물질적인 성격이 가지고 있는 탕진의 표현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축제기간을 위해서 사람들은 근 1년간 축제를 준비한다. 재물을 축적하고, 굳이 힘든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축제기간이 되는 순간 그들은 그동안 축적했던 재물을 아낌없이 쏟아 붇는다. 그리고 그것을 쏟아부으면서 그들은 축적한 술을 꺼내어 서로 과도하게 나누어 마시고, 고기를 구워 마치 걸신이라도 들린듯이 그 고기를 뜯는다. 그런 탕진의 행위를 하면서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광란에 가득찬 춤을 춘다. 그것은 마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빠르게 소비하면서 파괴라는 광기를 '즐기는 것'만 같은 느낌을 관찰자에게 주는것만 같다. 이것은 인간의 야성을 매우 잘 표현하는 것만 같다.

나는 전쟁을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전쟁을 위해서 국가들은 많은 축적한 자원들을 일시에 풀어놓는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력을 상대하기 위해 그들은 엄청난 수의 '총알'을 만들고, '총'을 만들며, '대포'를 만들고 '폭약'을 만들고, 그들의 노동력의 근원인 국민을 동원한다. 마치 전쟁이라는 하나의 것에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엄청난 자원을 일순간에 쏟아부으면서 그들 스스로를 표현하고 그들 스스로의 위치를 타인에게 보여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과 머신건의 총알을 연발하면서 나오는 '타타타타'의 탄피소리와 그 냄새, 그리고 곡사포의 굉음을 동반하는 대포소리와 그 전장의 모습은 마치 그 탕진이라는 추상적인 목적을 시각적 청각적 후각적으로 동시에 보여주는 듯한. 그리고 그것들이 '파멸'이라는 목적지를 향해가고 있는 미친 경주마의 질주를 연상케 한다. 이것은 축제에서 보이는 인간의 야성과 그 모습이 닮아 있다.

첫번째 관점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관점이었다고 한다면, 다음의 두가지는 전쟁이라는 비극이 가지고 있는 예술성이라고 말을 하겠는데, 하나는 전쟁 안에서 다른 하나는 전쟁과 관계되어 발생하는 것이다. 전쟁 내적인 것으로는, 그 전쟁안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모습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전쟁에 동원된 사람들은 전쟁에서 선택의 갈등을 겪는다. 과거부터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배웠던 사람들은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고,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규범을 포기하여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 발악할 것인가, 아니면 규범을 준수하여 자신의 목숨을 죽음의 한복판으로 내던질 것인가. 이것은 마치 1900년대 초반의 독일 청년들의 자살열풍을 상기시킨다. 전쟁이 몰고온 비인간성에 좌절하여 자신의 합리성에 대한 정체성을 찾지 못한 젊은이의 자살과, 그 정체성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고통에 몰아넣고 자학하다가 결국 자살에 이르고야 만 사람과, 그런 사람들의 전기를 쓰면서 그 고통을 기록하다가 스스로 슬픔에 빠져 자살을 하게 된 사람. 이것은 마치 아름다움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끊임없는 고통을 감내하던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과 절망적인 사투를 보이는 것만 같지 않으며, 이것이 어찌 아름답지 않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다른 하나는 전쟁이 불러오는 생활세계에서의 비극이다. 윤흥길의 「장마」를 상기하라, 윤흥길의 장마에서 삼촌(빨치산)과 외삼촌(국군)은 서로 죽여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는 두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외가와 친가의 모습은 처음에는 서로가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각자의 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모습이 드러난다. 하지만 외삼촌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게 되자, 외할머니는 모든 빨갱이가 죽어야 한다의 논조로 저주를 퍼붓게 되고, 친할머니는 외할머니와 사이가 나빠지게 된다. 그 이후 친할머니의 아들인 삼촌의 죽음을 상징하는 구렁이가 집안에 들어오게 되고, 친할머니 역시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마지막에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를 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기존에 한국인들의 규범이었던, 가족간에서는 서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은 가장 원시적이고 어겨서는 안 되는 규범이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선택할 수 없는 외부의 조건에 의해서 어겨지게 되는, 선택하는 딜레마의 상황조차 오지 않는 순간에 도달하게 되고, 그것의 분노가 서로와 서로를 향하게 된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온전했던 가정속에 불화가 싹트고 극에 치닫는 순간, 그 작품의 등장인물인,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전통의 입장을 준수하여 서로의 심정을 서로 다스리고 그 문제에 타협을 봄으로써 그 엄청난 낙차와 함께 Peripeteia를 발생시킨다. 이것은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삭혀내고 그것을 승화하여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사건들을 그들의 선택으로 극복하고 규범을 되살리는 가히 '성스러운 모습'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위와 같이 나는 전쟁이라는 것은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전쟁이 발생한다면, 전쟁이라는 것이 가지고 오는 것은 혼돈이고, 뭉쳐있던 규범이라는 거대한 에너지가 일순간에 파괴되고, 그 인간들에게 선택의 문제를 보여주며, 그 인간들이 딜레마의 상황에서 선택을 함으로써 기존의 규범에 근거한 성스러운 모습을 보임으로써 다시금 '강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질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보았을 때, 전쟁이라는 요소는 오히려 축제라는 단기적인 것들에 비해서 더욱 더 강력하고 위대한 아름다움을 물질적인 방식으로든 비극적인 방식으로든 정신적인 방식으로든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근거하에 전쟁은 비극적이지만 예술적이라고 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