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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인류학자, 여자 화장 신기, 원자적 분자적, 고전속담 탁월, 논리적 해석의 필요

종합유추 2015. 4. 15. 01:04

1. 지하철 타고 가면서 한 려성을 보았는데, 무려 40분동안 화장을 하더라. 그녀의 작아보이는 핸드백에서는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화장도구가 나오는데 마치 도라에몽의 주머니를 보는 기분. 도구가 하나 하나 바뀌어 갈때마다 얼굴에 색조가 하나 하나 덧 씌워지기 시작하는데 더욱 신기한 점은 자기 손만한 사이즈의 거울에 얼굴을 비추면서 화장을 한다는 점. '지하철의 덜컹거림따위는 필요 없어 난 전문가니까!'하고 외치는 듯한 느낌
그리고 보니 맨 처음 얼굴과 맨 마지막 얼굴의 갭은 좀 컸다고 말하고 싶다. 화장이 아니라 변장이구나. 저렇게 하는 것도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 하기 때문인가 하니 좀 피곤한 일

2. 예전에 인류학 시간에 들었던 수업의 간단한 지식을 회상하자면, 어떤 인류학자는 여성이라면 사실 투실투실해야 몸에 있는 지방분도 많아 생존에 유리하고 아이를 낳을때도 유리하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그런 여성이 선호되어 왔다고 말을 함.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타인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자원을 베푸면서 낭비하고 이를 통하여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는 형식의 문화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봄

그에 반해서 지금의 경우에는 물질이 풍요로운 시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은량의 물질자원을 베푼다고 해서 선호되기 힘들다는 점. 그래서 그 사람들은 다른 방식의 선호의 메커니즘을 구성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살을 빼는것. 자신의 생존에 필수적인 지방을 소모하고 오히려 열량 소모가 많은 근육을 기름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낭비를 과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해석인데. 나름 재미가 있는 해석, 진화심리학은 거의 소설이긴 하지만 인류학도 사실은 소설이니 무슨 구분이 필요할까. 그저 재미있는 소설일 뿐

3. 원자적인것과 분자적인 것는 다른것. '~적'을 유심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 분자적인 것에는 관계가 있고 원자적인 것에는 관계가 없다는 점. 단순히 원자적인 것을 같이 두어 분자적인 것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관계조차도 원자와 동일한 층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음. 사실 자꾸 이런말을 들으면 어딘지 모르게 부담스러움

4. 사태에 대해서 아는만큼 보인다는 사실은 매우 적절헌 속담으로 생각 됨

예를 들어 어제 청명씨가 이야기 했던. '와 저거 명불허전이다.'라고 했던 말에 조차도 '이름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을수 없다.'라는 뜻이긴 한데, 이것은 언화된 말을 넘어서 언어 그 자체에 진리값이 있단 소리로 보임. ㅋㅋ 언어철학의 문제 ㅋㅋ

상대방이 나와 유사한 동종의 인간이라는 꽤 자비로운 유예를 해서 상대방의 의식을 추론해본다면, 사실 그 사람들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이며, 혹은 알지만 아직 고민해본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경험한 문제를 보지 못한다는 점 정도.

어떤 특정 논리적 가능성에 대해서 비록 유사하나마 사전적으로 고민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현상을 이해시키려는 행위는 사실 헛된 짓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과거 내가 어떠한 고민들을 했었는가에 대한 문제도 지금의 현상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꽤 유의미한 논점들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임.

5. 애초에 현상들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이 논리적인 해석밖에 없다고 해서 현상을 설명하려는 논리적 해석을 버리는 것는 생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과 크게 다를바가 없어보임. 처음부터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능력이 제대로 훈련되어있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라면. 다시 말해 세계는 곧 나의 사유이자 경험의 전체라는 말에 대해서 추론적으로 도달해보지 못한 사람의 경우에는 세계에 대해서 특정할 수 없으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것을 특정할 수 있는 사람이 그것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이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지 알면서 그것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어 보임 그것은 죽는것과 진배없는것 같음.

살아있기 때문에 딜레마에 빠져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비극적인 성품이자 나의 인간의 성품일진데, 이것을 갖지 않는 다시 말해 선택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적이기 보다는 죽어있는 인간이나 동물과 같이 보임.

어찌보면 내 병신같은 집착도 살아있다고 말하기 위해서, 내가 살아있는 버러지같은 인간임을 말하기 위해서 하는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충분히 가능성있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고통스러운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새로운 앎에 대한 접근이자 나의 고통에서 탈출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실체는 경험한 적 없는 신기루일지 모르나. 사막에서 신기루라는 헛된 희망조차 없는 사람보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