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감상평
감상평을 쓰려고 했는데, 페이스북에 길게 늘여 쓰는 것 자체가 그다지 크게 의미 없을 것 같아서 내 노트에 조금 남겨두겠음.
1. 이문열의 저작 사람의 아들은 1970년대판하고 1980년도 수정판하고 두개가 있음. 나는 1970년대 판하고 1980년대 판 둘 다 읽어봤는데 내용상 그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같음. 1980년도 후반부에서 이문열이 밝혔다시피 초판과 다르게 1980년도에는 이제 그 내용상에 자세한 각주같은 것을 달아 실질적인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개선을 한 것으로 보임. 다만 그 개작을 함으로써 소설의 개연성 내지는 인과성의 부분이 좀 많은 부분이 루즈해져서 오히려 1970년대판이 198...0년대 판에 비해서 좀 더 자연스럽다고 말하고 싶음.
2. 사람의 아들 뿐만 아니라 이문열의 소설이 대개 그렇듯, 이문열은 내용 자체에서 어떤 특정 상황을 묘사하는데 치중하기 보다는 연설하고 주장하고 근거를 찾아 제시하는데 그 초점이 많이 맞춰져 있는듯 싶음. 색채적인 속성이나 부차적인 묘사와 같은 것을 짜넣어 독자로 하여금 그것을 상상하는 가운데서 상상하며 따라가게 만드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해당 소설의 경우에는 그런 외적인 상황묘사에 바탕을 두어 마치 논설문을 읽는듯한 느낌을 받았음.
어떤 작품들은 마치 붓의 한획을 그릴때 그 곡선을 살려 부드럽고 매끄럽게 긁어내 작품내에 부드러움이 돋보이지만, 이문열의 경우에는 한 일(一)의 획을 그림에 있어서 강인하게 뻗어내는것과 같아서 이문열 문체에 익숙하지 않다보면 굉장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까 싶기도다만 그런 곧게 뻗은 강인한 문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은근히 많지 않나 싶음. 소설 자체는 형식적으로는 상당히 정적인데, 형식과 실질이 합쳐지면 그 무엇보다 역동적일 수 있다고 봄.
3. 사람의 아들의 전개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고 평하고 싶음, 소설속에 또 다른 소설을 넣어두고, 그 소설과 현실이 반복적으로 얽혀나가면서 주제의식을 구성하는 형식의 독특한 소설인것 같은데. 이문열이 중간중간 던져주는 힌트는 장을 구분할만한 소재라고 생각함. 민요섭의 처음 '아하스 뻬르쯔'와 조동팔을 만나고 나서의 '아하스 뻬르쯔', 그리고 거의 마지막에 도달한 상태에서의 아하스 뻬르쯔는 분명히 다른 색채를 가지고 있는 아하스 뻬르쯔라고 보고 싶음.
4. 예전에 기억할라나 모르겠는데, 형이 있음과 없음의 문제를 나에게 이야기 한적이 있음. 모든것의 시작은 인간이 '~이 아님' 다시 말해 '부정'을 상상할 수 있음에서 발생했다고 형이 8개월전쯤인가 나한테 이야기 했었지. '부정'이 상징하는 바는 꽤 중요한것 같다. 요새는 생각하고 하루지나면 대개 다 까먹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형에게 서술해줄수는 없지만, 대강 이런 문제라고 봄.
현존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유니콘을 상상함에 있어서도, 인간이 유니콘을 상상하는 방법은 기존에 알고 있는 개념적인 것들에 대한 종합적인 구성에서만 가능하다는거야. 아마 과거에 내가 형한테 보여준 글 중에 하나인 '지성적 앎'과 '감각적 앎'에 대한 부분도 이와 비슷한 논의를 하고 있지. 그렇다면 '인간이 없음을 지시할 수 있느냐', 혹은 '없음 자체를 상상할 수 있으며 없음 자체를 말할 수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개념적으로 있음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써의 없음은 상상할 수 있으나, 그 이상의 없음에 대한 기술을 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있음의 개념을 없음에 대입해야 한다는거지.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없음 조차도 결국 있음에서 파생되는 개념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 같아.
'인간은 자신에게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함이라는 것은 결국 내적인 개념에 대한 지시에 불과하여, 설령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시하는 그 중요한 의미는 소실된 하나의 행위에 불과하다.'
5. 내가 도화지에 빨간색을 칠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빨간색으로 칠해진 스케치북'이 될거야. 하지만 그것을 지각하고 하나의 개념으로 습득한 순간 기존에 알고 있던 빨간색으로 칠해진 스케치북에 대한 개념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의식의 흐름속에 녹아들어 기존에 알고 있던 개념의 범주를 확장시킬 것이라고 봄. 2014-2월달에 내가 메세지로 말했던 개념의 무한한 확장의 단계에 있다고 말하고 싶음.
같은 이야기로, 감각적으로 주어진것과 감각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이 있는 두가지 층위에서, 감각적으로 주어지지 않은것 (흔히 말하는 '없는것'과 '추상적인 것')이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을 통해 서술되는 가운데 '신'은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그 상황에서는 신이 인간을 찾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고 보나, 이제 그 신에 대한 기술을 남기는 순간 그 신에 대한 기술은 외적인 것이 되고, 그것을 반복지각함으로써 그 신의 속성은 변형되는 것 같으며, 그 신에 대한 논의를 2명 이상이 하는 순간, 후에는 인간이 신을 찾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나 싶음.
우상숭배에 대한 배격이나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알 것 같기도.
-대강 이러함. 예전만큼 글빨이 받지를 않아서 깔끔하게 쓰기 힘드네 알아서 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