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法源)을 향해 나부끼는 노오스떼르지아의 손수건
법대에 처음으로 입학했을 때 처음으로 사게되는 법률서적은 법전이다. 시험용법전과 소법전. 사실 법전 입문은 현암사 소법전으로, 정확히는 거기에 딸려있는 기본3법전으로 하게 된다. 순한글에 가볍고 판례가 수록되 있지 않아 고사용 법전의 요건에도 부합한다. 실질적으로 소법전은 거의 사용하지도 않을 뿐더러 영악해지고-소법전 살 돈으로 고기나 먹곤 하면서- 공부하기 싫어서 시험용법전만 매년 사다가 격년으로 그러다 기본6법전으로. 참 잘난 학습행태이다. 정말.
자고로 법학도의 의무란 순백의 답안지에 단지 법전에만 의존하여 유려한 필체로 조항간의 구조와 관계를 규명하고 해당 사안의 쟁점을 해석하고 풀어내어 답안을 박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 나는 반푼어치 법학도. 그리고 그곳에는 법전과 친하지 않은 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나같은 사이비 법학도에게도 법전과 그에 실린 조문들은 법학의 절대명제. 순종의 도그마. 나 이외의 다른 ...규범은 섬기지 말 것을 요구하는 오롯함인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법전휴대나 법전탐색의 불편함은 쉬이 이런 사실들을 이겨버리고 만다. 무겁고 귀찮다. 서측의 검은 마크에 의존하여 어림짐작으로 조문을 찾는 과정은 번거로우며 그래서 자연히 멀리하게 되고, 교과서에는 친절히 조문번호와 내용이 상세히 분설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무엇이 조문이고 무엇이 학설이며 무엇이 판례인지 하나로 혼화되어 기억에 남는다.
특히, 20세기에 상상할 수 있었던 가장 21세기다운 발명품인 스마트폰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법학도의 필수 앱. 국가법령정보센터. KoreaLaw의 편의성은 무겁고 귀찮은 종이법전을 씹어먹는다. 구조가 괴랄하기 짝이 없는 회사법 조문들 뿐만이 아니라 부진정연대채무자 간에 절대효사유로 상계가 포함되는지 "당원"의 판단은 손쉽게 4인치 디스플레이 장치에 고스란히 떠오른다. 가히 "이것이 디지털이다!" 내지는 "이것이 21세기다" 라는 광경이다.
극히 보수적인 학습환경이 지배하는 이 법학의 전장에서도 혁신은 일어나, 강의실 책상마다 콘센트가 설치되고 안테나가 4개나 달린 AP가 설치되며 노트와 강의안과 교과서가 쉴새없이 넘어가는, 종이냄새나는 광경보다는 귓전에 울리는 펜타그래프 타자소리, 혹은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정전식 터치패널을 애무하는 모습만 가득하다. 자보다도 정확하게 밑줄이 그어지고, 교수님의 입에서 떨어지는 모든 말들이 쿼티 자판 위에 산산이 아스라지는 것. 총천연색 풀 칼라의 디스플레이로 커서를 조준하고 글쇠를 당겨 발사!
打打打打打打!
강의실에 경쾌하게 울려퍼지는 탄두 없는 총성의 향연.
그러나 이런 이진수의 전장에서도 여전히 파푸아뉴기니의 나무들은 종이의 전제조건으로서 실천적 유용성을 갖는다. 자고로 법학이란 펜을 들고 종이 위에 활자화된 조문과 이론에 밑줄 빡빡 쳐가며 보는 맛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편의성의 측면은 떨어지지만 그래야 뭔가가 머릿속에 들어와 박힌다는 것은 공부안하고 맨날 쳐놀기만 하는 나도 잘 안다.
특히 조문을 찾아보는 행위가 몇메가 안되는 앱에서의 몇번의 손가락놀림으로 찾을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종이를 넘겨가며 팔락거리는 아날로그는 아직 유효하다. 조문이 적힌 법전페이지는 저 푸른 법원(法源 )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종이법전의 그 두꺼움은 법학사적으로 유의미한 수많은 사건들과 이론들의 정반합적 발전의 반증이요, 그리고 그만한 의미부여가 과연 앱에서도 이루어지냐 했을때 회의감이 드는 것은 지나친 아날로그적 감성팔이일까.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액정장치들이 일상화되어 배터리가 깜빡거리고,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으면 내 마음도 잡히지 않고 기억도 깜빡거리는 디지털의 배신속에서도 여전히 종이 법전은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법전플레이라는 말이 있다. 주로 공부가 부족한 과목을 시험장이란 법정에서 변론할때 쓰는 말이다. 그 공간 안에는 나와 법전 오로지 둘 뿐. 펜은 법전에 깊이 의존하여 답안지 위에서 춤을 춘다. 그리고 법전 플레이에 허용되는 법전이 "판례가 수록되지 않은 시험용법전"이라는 한계요소가 깨어지지 않는 한, 현암사의 파산은 매우 먼 미래의 일이다.
" 여기에 장미가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Hier ist die Rose, hier tanze)."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빌헬름 헤겔 , <법철학>.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