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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경험칙, 제목이 기억 안 남

종합유추 2015. 4. 15. 01:27

3-2. https://www.facebook.com/hyoyoung.h.kim.5/posts/772103636147508
일단. '사회와 개인' 그리고 '개인과 개인'의 논의를 하면 오늘 날을 새도 이야기를 하지 못할 것 같으니 3에서 목적으로 하는 '사랑함'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흔히 일상에서 연인들은 상대방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다음과 같은 경우를 자주 직면하는데, 저 사람은 왜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그런 종류라고 말하고 싶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추상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도 나를 사랑해야한다든지, 혹은 나는 상대방을 사랑하는데 상대방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던지 하는 고민을 한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큰 불만을갖고 있다. 그 이유는 문제1에서 설명했다시피, 당연히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것과, 사랑함이라는 매우 추상적인 단어를 상대방에게 외치면서 마치 그 사랑함이 상대방과 '같은 사랑함'이길 바라는데 있다.

이것은 흔히 하는 규범의 확장의 오류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일단 규범성이 강조하는 것은 다른 인간을 존중하라의 취지에서 논해지는 것은 분명한데, 이것이 '상대방'을 나와 같이 대하라는 목적은 사실상 상대방의 의식상태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추론적으로 최소한 '이해하기 위한 용도'로써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최소한 나와 대화할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거나, 대화의 예의를 갖추고 있다던가 하는 전제에서 출발하여야 상대방에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며, 상대방을 전혀 나와 같은 대상으로 여길 수 없는 것들(예를들어 나무라던지, 사과라던지.)에 대해서 나와 같이 대하고 교류를 시도하는 것은 만일 그 대상에 대해서 환각같은것을 가지고 있어서 나무나 사과가 인간으로 보이는 신선한 '정신세계'를 가진 소유자가 아니라면, 생각컨데, 비-경험적이다.

결국 교류에서 발생하는 '공감'이나 '소통'이라는 것은, 사실상 타자를 내면화 시킴을 통하여, 대상의 말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나 시도에 불과한 것이며, 타자의 감각에 대한 온전한 '앎'을 갖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나는, 나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내가 '원초적으로 소통 불가능'함을 안다. 나는 내가 남을 사랑하는 것은 알아도 남이 나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무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유일하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경향성에 대한 내적 추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시 한번 말한다. 상대방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내가 진심으로 상대방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랑함에 앞서, 사랑함을 유발시키는 나의 '의도'를 선재(先在)한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사랑함'은 언화행위에 불과하며, 형식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항시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함'의 감정에 대해서 말하지만, 나는 사랑함이라는 말을 통하여 상대방에게 그 사랑함에 선행하는 나의 의도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타인에게 사랑함의 감정을 갖는가. 나는 그것을 '선호'라는 말로 일축한다.

->(물론 다음과 같은 사실은 고려할만하다. 내가 지각한 상대방 역시 내가 감각적 혹은 지성적으로 알게된 대상이라, 실재하는 대상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내가 알 겨를이 없다. 내가 누군가를 선호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개념이 나에게 주어져 있어야 하는것인데, 이것 역시 내가 가지고 있는 개념적인 것이므로, 결국 대상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으며, 이것은 나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콩깍지에 씌이다.'는 해명 가능해보인다.
또한 이미 나에게 있는 것에 대해서 '선호'를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상대방을 선호한다는 것이 곧 나의 개념적인 것을 선호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로부터 나온것을 선호하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나는 '나'를 좋아하는, 타인을 사랑하는 자는 '나르시스트'일 수 밖에 없음을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한다.)

그렇다면 선호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 선호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감각에 의한 선호와 규범에 의한 선호가 바로 그것이다. 감각에 의한 선호는 대상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로써 지극히 개인적 페티쉬를 의미하며, 후자의 규범에 의한 선호는 외모나 재력등의 외적인 사회적 규범에 의하여 습득된 것을 의미한다. 선호는 동시에 선호하지 않음을 동반한다. (예를 들어 무엇을 선호한다면, 그렇지 않은 것을 기피한다던지.)

예를 들어, 내가 가지고 있는 지적인 사람에 대한 페티쉬(집착)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사람이 말하길 지적인 사람에 대한 페티쉬는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전교1등에 대한 동경이기 때문에 많은 습득된 규범적 선호라고 말을 하겠지만 사실 이는 규범적 페티쉬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 성실함이나 공부 잘함과는 다르게,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고, 적절하게 대답할 수 있으며 지적인 자극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에, 규범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는 습득된 개인적 페티쉬에 가깝다.), 나는 말을 잘하는 사람에 대한 일종의 '동경'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렇기에 이정희와 같은 여성에 대해서 강력한 선호를 보내며, 간혹 그런 여성들에게는 내 '통제'를 이양하려는 의도까지 갖기도 한다. 이것을 나는 일종의 복종이자, 일종의 '선호'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데, 수지나 김태희를 두고, 미인이라고 말을 하면서, 미인이기 때문에 그녀와 잠을 자고 싶다던지, 혹은 사귀고 싶다던지와 같은 선호를 보내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규범적인 선호라고 말을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준거를 자신에게 찾지 않고, 규범적으로 선택된 것을 선호하는 것을 의미하며, 규범이 가지고 있는 강제성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나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나로부터 나온것이 아니라 강제되고 있는 선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호 관계는 실질적으로 일상생활에서 타자와 관계를 맺을 때 매번 등장한다. 예를들어 나와 가까운 현준이 형, 그분, 상천씨를 비롯한 많은 분들에게 있어서 대체적으로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음에 대한 선호라고 말을 할 수 있다.(현준이 형은 이를 입을 통한 리비도의 방출이라고 말을 했으며, 김교수님께서는 대화 참여자들의 말을 통한 자음과 모음의 교접에서 발생하는 성적 쾌감이라고 비유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머리에 들어찬게 없지만 얼굴만 아름다운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데, 첫번째로는 대화를 못하기 때문이요, 두번째는 나는 얼굴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규범적 질투를 불러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거니와, 세번째로는 내가 교류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고 난 말을 한다.

이것은 앞서 제시한 것과 같이, 내가 선호를 보내는 대상들과 나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자하는 욕구가 있다면, 그 욕구는 필히 나의 선호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음에는 분명하다. 또한 이미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면, 그 가운데에서 서로는 서로에게 각자의 선호를 상대방에게 지향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나는 연인이나 친구 모두 그러한 관계의 형식적 이름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관계를 유지함으로 상대를 선호를 통해 '사랑한다' 라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사랑함을 확인하는 과정은 선호를 확인하는 과정이지, 나와 같은 사랑을 하는 과정은 아니고, 결국 이것은 달리말하자면, 사랑이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용어'임을 말할 수 있을것이다.